이 세계에 바다는 두 개 있어 그것이 하늘과 땅을 가르고 사람의 존귀를 나눈다. 땅의 바다는 끝도 없이 펼쳐진 텅 빈 바다를 넘어 이 땅에 당도한 손님에게 있어 전혀 낯설 것 없는 성질의 것이었으나 땅 위에 사는 이들이 구름의 바다라 칭하는 하늘 역시 또 다른 바다였다. 그리고 그 바다를 넘어 더 위로 오르면 놀라운 세계가 펼쳐졌다.

  운해의 위는 꽉 막힌 것처럼 흐름이라 이를 만한 것이 거의 죽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마치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을 감상할 때와 같은 감동과 사람 사는 곳 같지 않은 불편한 이질감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인간이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은 곧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며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했다는 반증이다. 요코는 그 한가운데서 살아가는 구름 위 바다의 주민이며 또한 주인이었다.

  요코는 저를 감싼 기류를 느끼며 작게 숨을 몰아쉬었다. 답답하게만 느껴졌던 텁텁하고 정적인 공기가 언제부터인가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물장난을 치는 어린 아이의 소매를 몰래 적시듯 계절의 변화는 하계의 모습을 구름 위로 빨아올리고 있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 새 가라앉은 기류에 열기는 상당히 빠져 있었다. 덥고 습한 기가 조금씩 건조하게 식어가며 머릿속을 차곡차곡 누른 열기며 건기를 내어놓고 있었다. 그녀는 새삼 제 양팔을 끌어안듯 붙잡고 속으로 되뇌었다. 가을인가.

  올해는 여름이 시작될 무렵 요천산 아래 잠시 내려갔다 온 것을 제하면 계절 하나를 넘기도록 하계는 구경도 하지 못했다. 자잘한 일들이 뭐 이리 많은지. 하지만 그렇게 몰아친 덕분인지 오히려 바쁠 즈음인 지금은 놀러 나와 있다. 힘들어 죽겠다 불평할 때쯤 되면 관리들은 이렇게 한 번씩은 그녀를 풀어준다. 그것에 고마워하는 것을 보면 저 역시 조금씩 그들에게 길들여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신료들에게 길드는 왕이라니 어딘가 이상할 지도 모를 표현이다. 그 생각에 김빠진 웃음이 났다. 그런데 그 순간 시원한 듯 온기를 머금은 바람이 뒤에서 측면으로 밀어내며 비껴나가듯 힘 있게 스쳤다. 요코는 허공을 향해 말을 걸었다.


  “……오시지 못할 거라 생각했어요.”

  “왜 그렇게 생각했지?”


  어느 틈에 곁에 당도한 것인지. 묻는 남자의 목소리는 낮고 진중한 음색을 타고났지만 그 무게를 잊게 할 만큼 명랑하고 쾌활하다. 그 사이 사내가 일으킨 바람은 그녀에게 기척을 내듯 어깨를 밀고 그 위로 녹아내렸다. 더 깊이 눌러 지우듯 어깨 위를 반대편 손으로 잠시 감쌌다 놓으며 그녀는 대꾸했다.


  “이 시기면 바쁠 때잖아요.”


  사실 하계를 통 내려가 보지를 못하니 바쁠 때인 줄도 몰랐지만, 하는 사족은 굳이 달지 않는다. 그며 그녀며 모르지는 않을 이야기니 굳이 첨언할 필요는 없다. 쇼류는 옆으로 이어지는 난간에 기대듯 엉덩이를 붙이고 느슨히 앉았다. 그리고는 그녀가 한참 구경하던 것에 힐끗 시선을 주고 다시 돌아보았다.


  “운이 좋았거나.”

  “운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렇다면 마음이 맞은 것이겠지.”


  끝까지 모호하게 에두르는 답들뿐이다. 그런 식의 말투는 그를 알기 어렵게 하는 특징 중 하나였다. 그런 듯 아닌 듯 모호하게 줄을 타는 느낌. 분명하지 않은 것은 싫다며 대놓고 투정을 부려볼까도 생각했지만 그가 모호하게 구는 것은 늘 사적으로 단둘이 있을 때, 그리고 중요하지 않은 질문에 대해 답할 때뿐이었다. 혹은 굉장히 드물지만 연왕 스스로조차 확신이 어려울 때 정도일까. 그리고 방금 전 대화는 반드시 진위를 가려야 할 필요가 없는 일종의 안부 인사 같은 것이었다. 제가 생각했던 이유에 대해 그는 그리 궁금한 눈치도 아니었고 오히려 같이 스무고개를 하자는 듯 운이니 마음이니 하는 농이나 걸고 있었다. 말꼬리를 붙잡히면 꽤나 피곤할 텐데. 거기까지 이른 생각이 그의 말장난을 그러려니 넘어가기로 한다. 실은 그가 끝내 숨기더라도 제가 궁금해 할 여지는 없었다. 유리창 너머를 들여다보듯 훤히 보였다. 그에게는 유능한 신하들이 많으니 그들에게 맡기고 슬쩍 도망한 것일 테지. 아마 내일 아침쯤 되면 뒤늦게 출궁을 눈치 챈 측근들이 한탄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와 저는 이리 관들 몰래 한해에 두어 번은 만나는 편이었다. 딱히 정해진 것도 아니고 서로 이에 대해 연락을 주고받는 것도 아니라 엇갈릴 법도 하건만 한 번도 엇갈린 적이 없다. 저도 저지만 그도 그다. 어쩌면 엇갈린 것에 대해 제게 말하지 않는 것일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국경을 맞대고 이웃하고 있다 해도 왕과 왕의 만남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 한다. 그렇다면 그와 저의 잦은 만남은 다른 이들이 보았을 때 꽤나 신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비공식적으로, 그 중에서도 관들 몰래 단둘이 만나는 것만 한해에 두어 번인 것이니 이래저래 핑계 붙인 만남이며 공식적인 내방을 합한다면 아무래도 꽤 잦다. 애초에 그런 것들을 차치하더라도 요천에서 사귄 친구들보다 그가 더 익숙하고 친근하다면 역시 그건 문제가 맞기는 하겠지.


  “허리춤에 그건 또 뭐예요?”

  “이 좋은 보름날 밤에 술이 없으면 아쉽지 않겠어?”


  쇼류는 장난기 한껏 머금은 개구쟁이 아이 같은 웃음과 함께 허리춤의 술병의 목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는 여봐란 듯 가볍게 흔들어보였다. 운해의 잔잔한 파도소리에 묻히는 듯 이지러지는 듯 병속의 작은 파도는 저를 괴롭히는 이를 향해 요란하게 칭얼거린다. 분명 운해를 타고 건너왔다 여겼는데 현영궁에서 가져왔을까. 그런 것치고는 병의 모양이 지나치게 수수하다. 아무 무늬도 없고 모양도 균형이 맞지 않아 표면도 매끈하지 못한 데다 병을 빚고 굽는 과정에 기포까지 생긴 것인지 달빛에 희게 빛나는 둥근 몸체에는 작은 그림자가 고인 구멍마저 보였다. 그뿐인가. 자세히 보자니 여기저기 자잘한 실금까지 가있다. 구름 아래서도 자그마한 객잔에서나 몇 푼주면 쉬이 구할 수 있을 것 같은, 그야말로 술을 담기 위한 목적 이상도 이하도 아닌 딱 그 정도였다.


  “알겠으니 흔들지 말아요. 그렇게 마구 흔들면 맛이며 향이며 전부 날아가 버린다 하지 않았어요?”


  두 손을 얕게 들어 진정시키듯 허공을 가볍게 도닥이자 그는 손목을 이용해 가볍게 원을 그리다 마개를 빼고 병 주둥이를 입에 가져가 기울인다. 그리고는 시원스레 벌컥벌컥 들이켰다. 갈증 끝에 목을 축이는 것처럼 달게 삼킬 때마다 목젖이 위아래로 움직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즐기는 음식 중 제게 있어 제일 맛없는 것을 대라면 바로 저것인데, 저 모습을 보자니 참 신기하기도 하다. 그는 표정하나 찌푸리지 않고 즐기듯 꿀꺽꿀꺽 삼켰다. 요코는 그것을 빤히 쳐다보다 뒤늦게 시선을 거두었다. 계속 쳐다보고 있자니 괜히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쁜 짓을 한 것 같이 가슴이 꽉 죄는 기분이 들어 영 낯설었다. 유래한 이유를 알 수 없으니 역시 기분이 좋지는 않다. 그때 쇼류가 병을 다시 두어 번 둥글게 흔들고는 불쑥 제게 내밀었다.


  “?”

  “마셔.”


  요코는 잠시 당혹스러운 채 그것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국가적인 행사나 국빈 접대 같이 피할 수 없는 자리가 아닌 이상은 술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제가 술을 잘 못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것을 가져와 마침 생각났다는 듯 건네는 의도를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그녀는 어깨를 약간 움츠렸다. 방금 입 대고 마시지 않으셨던가.


  “마시기 싫으면 관두고.”

  “, 아니에요.”


  아차. 요코는 반사적으로 그의 손을 제지한 저를 원망했다. 술은 별로 마시고 싶지 않다. 더욱이 그의 입이 머물렀던 그 자리에 똑같은 것을 대는 것도 조금 껄끄럽다. 그가 닿아서 더럽다거나 불결하다거나 한 것은 아니다. 그저 괜히 창피하고 부끄럽고 꺼려졌다. 그리고 그게 저 혼자만 느끼는 유치한 마음임을 알아 티내고 싶지 않았다. 분명 사춘기 소녀라 이를 나이는 이미 오래 전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때에 멈춰버린 몸 때문인지 아직도 이렇게 유치한 생각에 간간히 휘둘리기도 했다. 요코는 눈치를 보며 머뭇머뭇 병을 건네받았다. 어떻게 하지. 뒤늦게 후회가 몰아치며 한숨이 난다. 그렇다 해도 지금 와서 피하는 것은 더욱이 여의치 않았다. 제 입으로 거두는 병을 붙잡았으니 지금 와서 어찌 철회한단 말인가. 사실 공식적인 자리도 아니고 중요한 사안도 아니니 번복하는 것 정도는 별일 아니라 생각하는 부분도 분명 있었지만 어느새 익숙해져버린 옥좌는 그렇잖아도 성실한 그녀에게 언행의 책임을 강요하고 있었다. 그녀는 결국 내키지 않는 손으로 떨떠름하게 쇼류의 손에서 병을 건네받았다. 상당히 비운 것인지 생각보다 가벼운 병을 두 손으로 감싸 쥔 요코는 속을 가늠하듯 잠시 병 주둥이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좁은 입구는 그 안에 채워진 것을 쉬이 보여주지 않았다. 밝은 한낮이어도 그럴 진데 날도 저물었으니 더욱이 보일 리는 없다. 요코는 티 나지 않을 만큼 작고 얕게 심호흡하고는 쇼류에게서 몸을 돌리고 병을 입가까지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입술에서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병을 띄워 얕은 한 모금을 목으로 기울였다.


  “…….”


  언제쯤이면 이 감각에 적응할 수 있을까. 요코는 입안을 훅 감싸고 식도로 잔상 같은 열기를 남기며 쓸고 내려가는 감각에 인상을 쓰며 한 차례 전율했다. 그리고는 입맛을 다시듯 작게 입술을 벌렸다. 그런데. 요코는 뒤늦게 놀란 눈을 깜빡였다. 되직하게 입 안에 조금 무겁게 남은 액체의 잔향은 조금 걸쭉한 질감을 입안에 남겨 고소한 와중에 달달했다. 시큼털털하긴 하지만 이건 마치. 그런데 그 모습을 쭉 지켜보고 있던 그가 소리 내어 웃고는 말했다.


  “술맛 모를 어린 애라 불릴 시기는 한참 지났는데 아직도 그 입맛은 용모 그대로군.”


  그리고는 요코의 두 손 안에 담긴 병을 빼앗듯 가져가 제 입으로 기울인다. 요코는 구수한 듯 알싸한 술맛에 잠시간 말도 잃은 채 잠자코 앉아있었다. 궁에서는 이런 것은 마셔본 적이 없다. 궁 밖에서는 술을 싫어하니 어지간하면 알아서 피했다. 그러니 서민들이나 마시는 이런 탁한 곡주는 그녀에게 있어 처음 맛보는 음료였다. 목을 넘어가는 느낌도 부담스럽지 않고 입 안으로 되직하게 남아 혀를 휘감는 맛은 고소하고 부드럽고 무겁지만 동시에 시큼털털하며 달달했다. 얼마 못 마셔 금세 배부를 것 같은 무게감이 있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왜 이런 것은 한 번도 궁에 올라오지 못했을까. 요코는 여운을 느끼듯 잠시 입맛을 다시며 입에 남은 잔향을 맛보았다. 그러다 뒤늦게 그의 말이 생각에 미쳤다. 또또 어린애 취급. 요코는 막 입술 위로 기울이려는 그의 손에서 병을 빼앗았다. 입술은 처음 맛보는 생소한 술에, 뾰족한 눈매는 오기에 젖어 있었다. 쇼류는 뜬금없이 술병을 뺏겨 민망한 손을 제 다리 위로 얼떨떨하게 내려놓으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나 참, 내기를 하자고 한 것도 아니고 크게 무시하며 아이 취급을 한 것도 아닌데 굳이 저렇게 고집을 부릴 것까지야. 오히려 그런 모습이야말로 더 어린 아이 같다. 그는 보란 듯이 술병에 입술을 꼭 붙이고 연달아 크게 몇 모금 들이키는 그녀의 옆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는 비식 웃음지어 버렸다. 크게 젖혀진 고개가 제 자리를 찾고 병이 입술에서 떨어질 때쯤 그녀의 눈은 이미 절반이 풀려 있었다. 그것은 둔하고 느릿하게 끔뻑거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래도 내가 어린앤가요. 그리 묻는 시선은 분명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고 사과하라며 화내는 의사를 담고 있었지만 그에게는 오히려 크게 끄덕이며 수긍하게끔 했다. 하지만 그리 했다가는 아마 고주망태가 된 저 소저의 고집에 휘둘려 내내 치다꺼리하다 금파궁까지 모셔다놓게 생겼으니 참을 밖에. 그는 웃음을 꾹꾹 눌러 참은 채 간신히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렇다고 거짓으로 아니라고 하고 싶지는 않았으니 회피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그나저나 이곳도 참 많이 변했군. 그는 요코의 시선이 저를 뚫을 테면 뚫어봐라 하는 마음으로 무시하며 운해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경국 최북단에 위치한 정주. 그 중에서도 가장 북쪽에 위치한 능운산은 임금의 사유지였다. 몇 대 전 경왕이 여름마다 사용하고는 하던 피서 용도의 별궁이었다고는 하나 굳이 운해 위에서는 피서가 필요하지 않다는 걸 감안했을 때 그저 사치와 향락에 목적이 있었음은 불문가지다. 요코는 사람의 손이 닿지 않아 텅 비고 을씨년스러운 이곳에서 사치스러운 장식이며 구조물들을 팔거나 국고로 환수한 뒤 간단하게 수리했다. 그리고는 사람을 모두 물리치고 가끔씩 저 혼자 들르고는 했다. 측근들에게조차 말하지 않았으니 가끔 제가 금파궁을 비울 때마다 이런 곳에 있기도 하다는 것은 아무도 모를 터다. 케이키야 기린이라 기척을 읽을 테니 언제든 제 뒤를 밟을 수 있겠지만 그는 요코를 배려하는 것인지 한 번도 그 그림자조차 밟은 일이 없었다. 물론 그녀가 필요 이상으로 수상하게 군다면 그때는 또 모르겠지만.

  요코는 멍하니 운해를 내려다보았다. 하계의 가을에는 무슨 일이 있더라. 이맘때쯤이면. 잘 떠오르지 않는 것을 억지로 기억해내려 노력하니 저절로 미간이 움츠러든다. 게다가 마치 명화의 밤하늘을 연상케 하는 희한한 광경을 내려다보니 금방이라도 빨려들 듯 앞으로 고꾸라질 듯 어질어질하다. 아무래도 몇 모금 급하게 들이킨 술이 꽤나 혁혁한 공을 세우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혀끝으로 입안을 더듬듯 잔향을 훑다 쇼류의 손아귀에서 병을 빼앗아들었다. 생각보다 자꾸 한모금만 더, 하는 식욕을 자극하는 맛이라 저도 모르게 조급한 욕심을 내게 되었다. 그런 때가 가장 위험하다는 누군가의 조언도 들은 것 같기는 하지만 요코는 단 한 번도 취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아무리 무거운 충고라도 한없이 가벼워질 밖에. 그녀는 마음만 앞세워 병을 크게 기울였다.


  “잠깐만, 요코.”


  말리는 목소리도 들린 것 같기는 하지만 그야말로 들린 것 같다는 느낌뿐이라 슬쩍 무시하기로 한다. 부담스럽게 가슴이 부대끼는 것도 아니니 취한 것은 아닐 거라 자부했다. 기분은 구름 위를 사뿐사뿐, 안개 속을 산책하듯 아슬아슬. 생각보다 너무 좋아서 이 느낌이 떠날 것이 벌써부터 무서워질 정도다. 마음이 앞선 손이 결국 입술을 제치고 저만치 기울어버린다. 그와 동시에 차가운 기운이 순식간에 가슴으로 스몄다.


  “,”


  둔하게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바로하자 뒤늦게 술이 목을 타고 흘러내린 감각이 한 꺼풀 너머에서 느껴진다. 그리고 옆에서는 핀잔하는 목소리가 그녀를 붙잡았다.


  “누가 술을 그렇게 급하게 마시나?”


  무안을 주는 목소리가 얄미운 말투와는 달리 다정한 손길로 제 목덜미를 더듬었다. 대충 그어내듯 무뚝뚝한 손길은 의외의 섬세함으로 그녀의 목덜미를 닦아내주고 얄짤없이 술병을 빼앗았다. 요코는 멍하니 뜬 눈을 끔뻑이다 그의 손이 떠나갈 쯤에서야 목을 확 움츠렸다. 커다란 손길은 의외로 따뜻해 도리어 한기를 느끼게 했다. 그리고 가슴으로 스민 술의 감각을 몇 배는 증폭시켜 소름끼치게 만들었다. 무심한 그 손길이 저를 얼마나 당혹시키는지 어째서 저 분은 모르실까. 존중해주어야 할 여자로는 전혀 보지 않으심이다. 요코는 자라목을 한 채 붉어진 얼굴로 그의 눈치를 보았다. 결국 또 어린애 취급이다.


  “당신 취했어.”

  “아니에요.”

  “취한 사람이 자기 취했다 하는 것 보았나?”

  “난 한 번도 취해본 적이 없으니 확실히 아니에요.”

  “, .”


  쇼류는 어이가 없다는 듯 기가 찬 눈길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을 내었다. 한 번도 취해본 적이 없다? 과하게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는 뜻일 리는 없다. 몇 모금 마셨다고 저리 눈이 절반은 풀린 것을. 그러니 이 여자는 단 한 번도 술을 제대로 마셔본 적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제 주량도 모르겠지. 이리 금방 취하는 것을 보면 주량은 꽤나 적은 듯싶은데 그조차도 마시지 않았다는 것은. 쇼류는 가만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분명 국가의 행사는 크고 작은 것을 불문하고 헤아려보면 역시 적지 않다. 술을 나누는 것 역시 필수라 그녀가 피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녀가 저렇게나 얕은 제 주량을 모르는 것은 이상하다. 누군가 그녀의 절주를 은밀히 도왔다면. 그는 마침내 가 닿은 생각에 한기를 느꼈다. 측근들이 걸러냈던 것을 제가 잔뜩 먹여놓은 셈인 것이다.


  “여하튼, 그만 마시는 게 좋겠어.”

  “마시라면서요.”

  “마시기 싫으면 관두라고도 했지.”

  “싫지 않아요.”


  한 마디도 지지 않는다. 저 저 쇠심줄 고집. 그는 요코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니 그녀는 질 수 없다는 듯 마주 올려다보았다. 얼마나 두 사람 사이에 시선이 오갔을까. 그는 졌다는 듯 다시 병을 내어놓았다. 어차피 얼마 남지도 않았으니 몇 모금 더 마신다 해서 더 극적인 것을 보지는 않으리라. 다만 저대로 궁에 돌려보낼 수는 없으니 잠자리를 보아놓는 것이 좋을 터다. 책임이라 하긴 뭣하지만 무리해서 마시는 것을 방치했으니 저도 오늘은 여기서 머무는 수밖에. 그는 한숨과 함께 그녀가 다시 병을 두 손으로 꼭 쥐고 야금야금 삼키는 것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따지 않았던 새로운 병을 들어 그것을 훅 들이켰다.


  “? 쇼류?”

  그는 한참 달게 병을 들이키다 말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사적인 자리 둘만 있을 때는 이름을 부르라 권해도 그럴 순 없다며 거듭 거절하더니만 방금 전은 조르지도 않았는데 이름을 불러준다. 그는 뒤늦게 얼떨떨해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요코의 묘하게 풀어진 눈은 그를 흐릿하게 담고 느릿느릿 깜빡였다.


  “또 있었어요?”


  무엇이. 잠시 멍한 와중에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을 정확히 타고 올라오니 그것은 제 얼굴이 아니라 제 손에 고여 있었다. 그제서 그녀가 말한 것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 싫다 할 때는 언제고 저렇게 욕심 많은 눈을 하고 서운하다는 양 쳐다보는 모습이라니. 그는 쓰게 웃으며 대꾸했다.


  “또 있었으면 하나 가지고 주거니 받거니 할 게 아니라 진작 나누어 마셨으면 됐잖아요.”


  심지어는 억울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이 더 우습다. 언제 제게 술 한 병이라도 맡겨놓았던 것인지. 그는 웃음을 간신히 내리눌렀다.


  “네가 그리 잘 마실 줄은 몰라서 맛만 보여주려 했지.”


  대꾸하기 어렵게 하는 그 답변에 요코는 못마땅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가만히 제 손에 들린 병을 보다 불현 듯 그의 앞으로 쭉 뻗어 내밀었다. 그는 의미를 짐작하듯 잠시 그것을 빤히 내려다보다 뒤늦게 이해했다는 듯 제 병을 들어 병 주둥이끼리 가벼운 소리가 나도록 맞부딪쳤다. 그러자 그제서 생글생글 웃는 얼굴을 한 그녀가 다시 병을 가져갔다. 그는 비식 웃고는 그녀의 곁에 앉았다.


  “으응, 좁아요.”


  거절하려고 내는 짜증 섞인 칭얼거림마저 어딘가 애교가 섞여있다는 기분이 든다. 그는 저도 모르게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터지는 웃음을 보이지 않기 위해 나름 필사적이었다. 간신히 헛기침으로 무마하고는 기어코 엉덩이를 들여 좁은 의자에 끼어 앉는다. 두 사람이 앉기에는 조금 좁은 듯한 의자는 요코의 몸이 가늘어서인지 간신히 두 사람을 수용해주었다. 그는 어깨 때문에 자리가 더 좁다 느끼는 순간 요코와 닿아있는 제 한쪽 어깨를 의자 등받이로 넘겨 걸쳐놓았다. 꽤나 바짝 접촉해있는 두 사람이었지만 술기운이 그 위화감도 둔하게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혹은 띄워 날리는 것만 같았다. 그와 그녀는 다시 한 번 병의 주둥이를 서로 마주하고는 낄낄 웃으며 술을 들이켰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오래간 깔려있던 침묵을 깨고 먼저 말문을 튼 것은 요코 쪽이었다.


  “그러고 보니 봉래는 아마 이맘때쯤 오봉 아니었던가요?”


  쇼류는 잠시 먼눈을 깜빡였다. 그녀가 건네는 말 중 특정한 단어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생소한 것 같기도 하고. 그는 생각을 포기하고 곧장 다시 되물었다.


  “오봉?”

  “쇼류 때는 없었나요? 조상의 혼을 맞이했다 다시 보내는 큰 명절 같은 거 있잖아요.”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오래된 기억 속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리고는 가볍게 저었다.


  “글쎄.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너무 예전이라.”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말이나 못하면.”


  얄밉다는 듯 비아냥대는 그녀의 입술을 엄지와 검지로 붙잡자 그녀가 작게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그다지 미운 소리도 아니었던 지라 같이 웃으니 그녀는 크게 기우뚱기우뚱 흔들리는 고개로 마치 리듬을 타듯 비교적 비슷한 박자로 알 수 없는 음조를 흥얼거리다 말했다.


  “사실 나부터도 기억이 잘 안나요. 명절이라 해서 명절 기분을 제대로 냈던 것도 아니고 그래서 더 흐릿하고.”


  옆에서 까딱까딱 흔들리는 고개가 볼 성 사나워 제 어깨에 억지로 기대게 하니 파드득 놀라 다시 고개를 세웠다가 다시 억지로 누르는 손길에 꾹 눌려 이번에야말로 얌전히 가라앉았다. 그는 제 어깨에 폭 기댄 그녀가 품으로 기우는 것을 느끼며 제 팔로 편안하게 그녀를 감쌌다. 이제야 좀 한 결 낫다.


  “, 섬 몇 개 붙여놓은 섬마을에 살다 보니 풍어제 같은 건 종종 지냈던 것 같기도 하다만.”


  그래요? 하고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과 시선을 맞추고 아마도, 하는 불분명한 대답과 함께 고개를 끄덕여주니 음, 하고 또 저만의 생각에 잠긴다. 그러더니 동그랗게 뜬 눈으로 운해를 쳐다보며 말했다.


  “, 그러고 보니 상세는 이맘때쯤 수확제 같은 걸 하더라고요.”

  “아아, 그렇지.”

  “그런데 그것도 이 세계에 오고 몇 년이나 지나서 알았어요. 즉위 초는 작물 수확량도 좋지 않아서 그런 거 하지도 않았으니까.”

  “나도 한 즉위 초 십여 년은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을 걸?”

  “그래요? 정말 그렇게 오래?”

  “잊었나? 절산의 황폐.”


  아아. 요코는 쇼류의 품에서 떨어져 나와 의심하듯 그를 올려다보다 이내 납득하며 그의 품으로 찾아들었다. 쇼류는 그녀를 품으며 크게 하품했다. 간만에 마시니 좀 취하는 것 같기도 하다. 곡주라는 게 모르는 사이에 훅 취해버리는 지라 정신을 놓고 있으면 요코 꼴 나게 십상인데 저도 오늘은 경계가 부족했던 것이리라. 그는 저 스스로를 달래려는 양 그녀의 팔을 둘러 안고 부드럽게 도닥였다. 그러자 팔 안의 그녀가 거의 녹아내리듯 완전히 긴장을 풀어버렸다.


  “처음 여기 왔을 때는 왜 이쪽세계는 조상의 혼을 기리거나 하는 행사는 없나 했는데, 나중에서야 알았어요. 여기는 사람이 죽으면 그대로 끝이라 여긴다는 거. 자손들을 돌본다거나 그런 거 없이.”

  “그러고 보니 나도 죽어보지 않아서 확답할 수는 없지만 그런 얘기가 있더군. 봉산에는 코우리라는 곳이 있어 죽은 사람의 혼은 그곳으로 돌아간다고. 그걸로 끝인 걸 테지. 산 사람은 죽은 사람을 조상신으로서 신격화하지는 않아. , 당신이나 나도 신 나부랭이쯤은 되니 백성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죽어서 신이 된다는 개념이 왕을 능멸하게 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일지도 모르고.”

  “그게 뭐예요.”


  요코는 웃음을 터뜨리며 어깨를 떨었다. 그렇게 우스운 얘기였나 싶어 잠시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던 그도 다시 곰씹어보니 꽤나 우스운 말이었다고 생각되었는지 같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그것이 잦아들 때쯤 요코가 그의 말꼬리를 이어 말했다.


  “그마저도 전설일 뿐이고 이야깃거리일 뿐이지 실제로 죽은 사람의 혼의 존재를 믿고 빌거나 감사를 표하거나 하지는 않는다는 거군요.”

  “그런 거겠지.”


  요코는 그의 말을 듣고 한동안을 침묵했다. 그리고 천천히 크게 심호흡했다. 그는 품안의 자그마한 인형이 부풀었다 작아지는 것을 느끼며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캐묻지 않아도 그녀는 머잖아 답해줄 터였다. 역시나. 이윽고 그녀는 말했다.


  “있죠, 쇼류. 그게 난 처음에는 굉장히 차갑고 냉정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오래오래 함께할 줄 알았던 사람이 어느 날 한순간에 떠나버렸는데 그걸 당연하게 여기고 납득해버리는 게 굉장히 낯설어보였고요.”


  쇼류는 얌전히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게 오히려 참 기분 좋게 여겨져요. 신기하죠?”


  그는 더 생각해볼 것도 없다는 듯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 곧바로 답했다.


  “그건 당신이 점점 왕이 되어가기 때문인 것 아니겠어?”

  “?”

  “왕은 산 사람을 위한 자다. 그러니 산 자들의 즐거움을 보고 듣는 것이 당연히 더 즐겁지 않겠어?”


  요코는 멀뚱멀뚱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답답하다는 양 다시 입을 열었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제 공이며 즐거움의 몫을 엄한 데 나누어 돌리지 않고 오롯이 제 기쁨으로 삼는다. 그게 어찌 보기 좋지 않겠나.”


  요코는 가만히 제 술병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건 꿈보다 해몽인 것 같아요.”


  그리고는 가볍게 병을 흔들어보다 그의 손에서 병을 빼앗아 그 손에는 제 병을 쥐어주었다. 텅 비어있는 느낌이 손바닥 안으로 감겨오는 것이 아무래도 이미 한 병을 완전히 동낸 듯싶었다. 그녀는 그의 병을 입가로 가져가 가볍게 홀짝였다. 정말 신기하기도 하다. 원래 술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이 처음 먹어보는 되직하게 시큼털털하고 달달한 액체는 자꾸 제 입술을 끌어당겼다. 소박한 정취는 부담스럽게 정갈하고 화려한 향취보다 더 다정했고 또 맛있게 느껴졌다. 그는 빈 병을 제 입으로 기울였다가 역시나 텅 비어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거 정주에서 난 곡주야.”

  “정말요?”

  “작년에 대풍이 들어서 그때 담가 잘 숙성된 놈들은 그렇게 맛도 좋지. 가끔 생각날 때는 일부러 여기까지 내려오기도 할 정도야.”


  요코는 새삼 놀란 눈으로 제 손 안의 병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멀리 시선을 떨어뜨려 운해를 내려다보았다. 마치 봉래에 있을 적 미술책에서나 봤던 유명화가의 밤하늘처럼 운해는 흐르며 뭉치고 반짝이며 터져 넘치는 빛의 무리들로 가득하다. 저 아래는 한참 흥겨운 수확제로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를 터다. 바닷물로 가려진 풍악소리마저 들리는 듯하다. 요코는 배시시 웃으며 그의 어깨로 머리를 기대었다. 어질어질. 기분 좋은 취기가 설렘과 함께 넘치는 즐거움으로 그녀를 흔들었다.


  “좋네요.”

  “?”


  그는 뜬금없는 요코의 말에 의아함을 표하듯 잠시 시선을 두다 되물었다. 그러자 요코는 눈을 감고 어지럼증을 즐기듯 가느다란 호흡을 들이켜고 내쉬며 웃음 지었다.


  “이맘때 운해는 참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맛까지 있을 줄은 몰랐어요. 그러니까 좋지 않겠어요?”


  쇼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그녀의 손에서 가볍게 병을 낚아채 쭉 들이키고는 답했다.


  “과연 그렇군.”


마침





원래는 지지난주? 주말 쯤에 귀환 하편이 올라왔었어야 했지만 이게 아무리 봐도 그대로 올릴 만큼이 못되는데 수정하는 것조차 여의치 않더라구요

아예 다시 써야 하나 싶을 정돈데 이걸 어떻게 다시 써야 하나도 가늠을 못하겠곸ㅋㅋㅋㅋ 

더욱이 요즘 직장에서 일이 너무 많아서 주말에도 출근해야 하는 상황이고 가족 행사까지 갑자기 겹치고

그런 상황에서 시간마저 여의치 않아 말도 없이 늦었습니다. 역시 저는 호언장담은 하지 않는 걸로..^.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ㅜㅜ


덕분에 귀환 하편은 좀 미뤄져야 할 것 같고(만약 정말 어찌 해도 손 쓸 새가 없다면 그냥.. 네...)

비축해놓은 글은 전혀 없...는 줄 알았는데 예전에 스터디로 급하게 뽑아올린 게 하나 있어서ㅋㅋㅋ

물론 당시 주제는 명절? 추석? 그랬기 때문에 때 소재가 지금 올릴 소재가 아니지만 이번달 내에 글이 아예 없는 것도 좀 그래서 그냥 올립니다.

지금 주변이 혼란스러워서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네요ㅜㅜ 

수정할 것들은 전부 이따 밤에 수정하겠고, 일단은 올리겠습니다ㅠㅠㅠ




  유연한 비대칭 곡선을 그리는 길고 푹신한 소파 한가운데 앉은 요코는 조금 긴장한 채로 허리를 세우고 뻣뻣이 앉아 하객들을 맞았다. 분명 제 인간관계는 협소하다 여겼는데 얼굴이며 이름마저 가물가물한 친인척이며 동창들까지 몰려와 살갑게 말을 건네니 당황스러울 따름이다. 솔직히 오늘이 제 날이라는 자각도 사실 별로 없다. 꿈을 꾸는 것 같은 와중에 번잡하고 소란스럽다. 귓가에 낮게 깔려 귓전을 잡아먹는 웅성거리는 소음들에는 꼭 한 번 이상은 제 이름이 끼워져 있어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불편한 기분이었다. 이 정도로 한꺼번에 제게 쏠리는 관심을 받아본 적이 없으니 그것들을 좀 더 여유롭고 유연하게 대처할 만한 대범한 마음가짐 따위는 애초부터 없었던 셈이다. 그렇게 이름조차 몰라 애먹어가며 받았던 손님들로 열 손가락을 몇 번이나 헤아렸을까.

  이 좁은 반구형 공간은 마치 사치스러울 정도로 잘 꾸민 새장 같다. 방을 꾸민 것은 약간 크림 빛이 나 따뜻한 감이 있게 느껴지는 새하얀 색뿐이다. 가끔 포인트를 주기 위해 금빛 장식물을 군데군데 배치해두기는 했지만 화려한 레이스와 풍성한 프릴, 늘어지는 휘장과 그 안에 홀로 앉은 제 모습은 온통 하얘 눈이 시릴 정도였다. 게다가 하객들이 무리지어 혹은 따로따로 들어와 옆에 앉거나 설 때마다 맞은편에 떨어져있는 카메라마저 연신 플래시를 터뜨려댔다. 이러다 눈이 멀어버릴 지도 모르겠다고 여겨질 만큼 흰색에 잠기는 느낌이었다. 이미 언제부터인가 숨은 턱턱 막히기 시작해 가벼운 현기증이 머리를 딱따구리처럼 쪼아대고 있었고 그마저도 점점 강도에 박차를 가하는 중이었다.


  사진 같은 거, 별로 찍고 싶지 않은데. 요코는 흘기는 눈을 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곁눈질로 가볍게 카메라의 렌즈를 쳐다보았다 그대로 시선을 흐렸다. 원래부터도 사진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나중에 남는 건 이것뿐이라는 어머니의 강압적인 조언과 못마땅한 얼굴의 아버지를 보니 불만의 말은 목 너머로 쏙 말려들어갔다. 굉장히 피곤한데.

  피곤하다 여겨지니 속으로 불평을 주렁주렁 늘어놓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옷은 우아하고 장신구는 화려하며 저 자신의 모습 또한 본 적 없이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지만 그녀는 속으로 이미 납득하고 있었다. 두 번 할 짓은 못된다고. 아침부터 대체 할 일이 뭐 이리도 많았던 건지. 고작 30분 정도의 본식을 위해 아침부터 이 고생을 해야 하다니. 물론 드레스며 면사포, 티아라, 순백의 신부 자체는 어렸을 때부터의 로망이기는 했다. 이리 지치고 힘들어도 한 번은 겪어볼만할는지도 모른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번.


  “아사노 씨.”


  그나마 아주 잠깐의 소강상태에 접어든 대기실에 목소리 하나가 끼얹어졌다. 다소곳이 앉은 채 잠시 눈을 붙이고 있던 요코의 눈이 반사적으로 반짝 뜨였다. 낯설지만 동시에 익숙하고 이제는 친숙해져야 할 울림임은 분명했다. 요코는 저에 대한 호칭이 아니라 여기는 와중에도 바로 고개를 들어 입구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제대로 된 웃음을 지어보였다.


  “아직은 아니야.”


  이내 얼굴을 과장될 정도로 불만스럽게 일그러뜨리며 말하자 입구에 서있던 여자는 싱긋 웃고는 들어왔다. 어딘가 차갑고 이지적인 느낌이 나는 이십대 초중반의 미인은 몸에 딱 떨어지는 검은 투피스를 입고 있었다. 결혼식에는 금기인 흰색과 검은색. 신부의 색인 흰색과 조의를 뜻하는 검은색. 그 중 가장 반갑지 않은 색상을 걸쳤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불편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요코는 오히려 한숨 돌리겠다는 듯 그녀를 향해 손짓했다. 또각또각. 높은 구두 굽 소리를 내며 요코를 향해 다가가는 그녀는 사진을 찍으려는 듯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는 기사에게 사진은 됐다 가볍게 손짓을 보이고는 그녀의 곁에 가 앉았다. 그것에 요코는 한 결 더 살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출장 때문에 못 올 거라고 했잖아.”

  “누구 때문에 새벽같이 공항에서 서성이다 마침 취소된 하네다 편을 끊어서 날아왔지.”

  “정말 고마워.”


  인사말 뒤로 진심으로 감사하는 의미를 담아 이름을 부른다. 유카. 그러자 이름을 불린 쪽이 쓰게 웃었다. 피곤한 모습을 보아하니 정말 저를 위해 급하게 출장 업무를 일단락 짓기가 무섭게 쉬지도 못하고 곧장 이곳에 온 모양이었다. 그래서 이런 정장을 하고 있구나. 요코는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꼭 붙잡았다.


  스기모토 유카. 요코가 그나마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존재는 그녀가 유일무이했다. 고등학교 시절의 동문이지만 정작 같은 반일 때는 그리 친하지 않았다. 그녀는 반에서 이유 없이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고 소심한 요코는 그것이 옳지 않다 여기면서도 저항하지도, 감싸주지도 못하는 방관자였다. 오히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에야 드물게도 요코의 적극적인 연락에 조금씩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원래부터도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있던 그녀는 우습게도 급우들과 어울리지 못한 사이 파고들었던 공부 덕분에 좋은 대학에 입학해 조기졸업을 하며 동창 중에서는 꽤 유명한 커리어 우먼이 되었다. 그때 가서 몇몇 동창들에게 꽤나 연락을 받고 있는 것 같다만 그녀가 어울리는 이는 요코뿐이었다.


  유카는 제 손을 붙잡는 요코의 자그마한 손을 내려다보았다. 열여섯 그대로인 자그마한 체구, 앳된 외모. 저 역시 많은 나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확실히 십대의 용모의 범주는 벗어났다. 하지만 요코에게는 마치 시간이 멎어버린 듯했다. 열여섯에서 열일곱으로 넘어가려던 그 겨울에 함께 얼어붙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내면은 녹고 얼기를 반복하며 성장해 외양과 어울리지 못한 채 삐걱거렸고 앳되고 순한 얼굴에 간혹 그 색을 비추고는 했다. 지금 역시. 유카는 제 손등을 덮어 붙잡은 그녀의 손 위로 또 다른 제 손을 들어 덮듯이 감쌌다.


  “괜찮아?”


  요코는 퍼뜩 놀라 제 친우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한참 뒤에서야 제가 당연히 답했어야 했을 반응조차 전혀 보이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혹은 당연히 괜찮지. 너무 좋아, 행복해. 그것들 중 하나 혹은 엇비슷한 말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왔어야 했다. 뜬금없이 물어오는 유카의 말은 스스로 회피하던 것에 직면을 종용하고 있었다. 의표를 찔렸다 여긴 순간, 요코는 아주 말을 잃었다. 유카의 두 손 안으로 감싸인 손은 분명 따스한 온기를 느끼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끝부터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앞이 흐리다. 붉은 융단의 시작점에 아버지와 함께 서 있는 느낌은 꽤나 기묘했으나 그조차도 지금은 관심을 끌지 못할 정도였다. 융단의 끝에는 꽤나 근사한 턱시도를 입은 아사노가 있고 양옆으로는 제게 시선을 집중한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눈으로 받아들이는 정보는 도저히 뇌에서 생각으로 변환되지를 않는다. 그저 보고 있을 뿐이고 들리고 있을 뿐인데 그것들은 제대로 와 닿지 않아 마치 겉핥기를 하는 기분이다. 저를 제외한 모든 것들과 단절된 기분이다. 긴장한 탓일까. 그리 생각하면서도 곧장 부정하는 스스로가 있었다.


  ‘괜찮아?’


  수면 아래서 흔들리던 불온한 낌새는 고작 친우의 말 한마디에 흙탕물에 작대기를 찔러 넣고 휘저은 양 부하게 일어났다. 아주 한참 뒤에서야 더듬어가며 당연히 괜찮지, 괜찮지 않을 게 뭐야, 하고 답했지만 그때 과연 저는 웃으며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었을까. 행복한 신부처럼 보였을까. 어쩌면 열여섯에 멈춘 시간에서 느껴지는 잔상에 아직도 저는 쫓길 뿐이 아닐까. 그것만은 차마 유카에게조차 말할 수 없었다.


  분명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다. 그렇다고 생각한다. 순수하다 못해 한심할 정도로 이 남자를 볼 때마다 가슴은 두방망이질치고 좀 더 예쁘게 보이고 싶고 제가 가지는 관심만큼 그도 제게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저와는 달리 위트 있고 사교성 넘치는 모습을 조금씩 곁눈질로 지켜보며 동경했고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세상에 남자는 아사노 이쿠야 하나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불안감이며 긴장감, 거부감은 대체.

  좋아한다.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제가 이 사람과 여생을 함께 해도 될는지의 자신이 없다. 그리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것이 결혼 직전, 결혼 당일까지도 신부가 가지는 불편한 속내라고. 이 남자가 최고의, 최선의 남자라 생각했는데 정작 그 이후에 진짜 제 반쪽을 만나버리면 어떡하나, 싶은 불안감. 그리고 부모님의 슬하를 떠나 한 가정의 공동책임자로 서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그 모든 것들이 다 당연한 감정들이고 결혼이라는 새로운 장에 발을 들이는 당연한 수순들이라고. 요코는 애써 불안한 감정을 내리눌렀다. 그녀의 세상에 남자는 스무 해가 훨씬 넘도록 저 사람 하나뿐이었으니까. 요코는 애써 흐린 시야 저편에 선 그를 응시했다. 그리고 저를 어른 말에 어폐가 있음을 알았다.


  스무 해가 넘도록, 이라고는 했으나 그가 그녀의 삶에 들이차 있던 시간은 그리 오래지 않았다. 그를 만나기 이전의 수년이 있었다. 그리고 행방불명됐던 삼여 년의 시간이 있었다.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꺼림칙한 삼년. 그 공백. 요코는 세간에서 카미카쿠시(神隠, 신이 아이를 숨겼다는 믿음. 의문의 실종. 흔적 없는 행방불명)’라 불리는 것을 당했다. 그간의 공백은 그녀의 기억에 전혀 없다. 그리고 행방불명되던 시기에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녀는 그 이상 성숙해지지 못했다.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무엇 하나 성장하지 못한 채 마치 공백에 모든 것을 잡아먹힌 듯 그녀는 멎었고 집념처럼 남아있던 하나의 기억을 좇아 지금의 친우를 찾았다. 스기모토 씨, 나는 돌아가야 해요. 고작 그 한 마디를 하러 먼 거리를 한달음에 내달았다 한다. 하지만 그조차도 현재 그녀의 기억에는 전혀 없다.

  그 부자연스러운 공백은 그녀를 어디까지나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성실한 모범생이었던 요코는 대학에 진학조차 할 수 없었다. 여자가 대학 같은 데를 가서 뭐하겠냐며 도리어 안심하는 기색인 아버지와 아쉬워하면서도 남편의 말에 절대적으로 따르고 마는 수동적인 어머니. 잃어버린 삼년은 십 수 년 고인 물을 순식간에 부패시키는데 크게 일조했다. 불량한 아이들과 어울리다가 잘못된 것 아니냐는 의심의 눈길은 학교에서 그치지 않았다. 집에서조차 받아야 했다. 더 엄격하고 예리한 기준으로 그녀를 폄하하던 것은 부모였다. 좀 더 말을 잘 듣고 얌전하고 순하게 고개를 조아리고 따르면 괜찮아질 거야. 스스로를 다독이며 이전보다 더 움츠린 채, 그 안으로 더 깊은 분노를 억누르고 이후 몇 년을 버텼다. 여자는 적당한 시기에 결혼해 가정을 꾸리는 것이 좋다는 아버지의 말에 스무 살을 찍기 무섭게 정신없이 선 자리에도 불려나갔다. 하지만 여전히 열여섯 같은 외모에 의문의 행방불명까지 당하고 돌아온 어딘가 모자란 여자. 그리 좋은 혼처를 기대하기는 어려웠고 그 사이에 아사노와 다시 연이 닿았다.

  아사노는 요코의 길지 않은 삶의 첫 일탈이었다. 부모는 연애결혼이라는 것을 혐오스러워할 정도로 내켜하지 않았고 요코는 그 앞에서 죄인이었다. 언제나 부모는 행방불명을 탓했다. 그 공백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이는 거냐. 정숙치 못하게 남자와 놀아나다니. 고개를 푹 수그리고 아무 대꾸도 하지 않는 속에서는 거대한 파도가 들끓었다. 나는 그 남자를 따라가지 않았어. 그 금발의 남자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단 말이야. 내가 원한 게 아니야. 억지로 끌려간 거라고요. 항의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그것이 폭발해 마침내 부모에게 가 닿는 때는 오지 않았다. 텅 비어버린 시간에는 무엇이든 채울 수 있지만 그 또한 허상일 뿐이다. 그 끝도 보이지 않는 구렁텅이 같은 삼년이 제일 무섭고 끔찍하게 느껴지는 것은 누구도 아닌 저다. 왜 이렇게 몰아붙이시는 거냐며 울부짖는 속은 어느새 타들어가고 있었다. 이제는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었다. 타인의 그림자 같고 으슥한 밤의 어둠 같은 저와는 달리 늘 밝은 아사노는 빛이었고 태양이었다. 그는 특유의 밝고 쾌활한 모습으로 얼음 같던 부모의 마음도 녹이고 마침내 결혼의 허락을 받아냈다. 자의든 타의든 첫 일탈은 성공이었다.


  떫게 손을 내미는 권위적인 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붉게 깔린 융단을 천천히 걷는다. 풍성하고 길게 늘어지는 드레스자락은 마치 누군가 붙잡는 것처럼 뒤에서 당겨지는 느낌이었다. 워낙 옷 자체도 무겁고 몸도 피곤한 탓이리라. 결혼식의 신부들이 느릿느릿 걷는 것은 이런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말 못할 불편한 감정 따위, 있을 리 없다.

  요코는 점점 가까워지며 커지는 아사노를 쳐다보았다. 오늘로 제 남편이 될 그 남자는 꽤나 근사한 어른의 모습을 하고 있어 함께 자라던 어린 시절을 막연히 떠올렸던 그녀를 약간 움츠러들게 했다. 더욱이 그 틈을 노리지 않고 속을 떠보기라도 하려는 듯 괜찮은지 묻던 유카의 말과 평생의 트라우마가 될 삼년의 공백이 머릿속을 번잡하게 휘저었다. 유카도 아사노도 그 외 제 동문이라던 이들도 전부 어른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고 그 사이에서 저만이 마치 소꿉장난을 하듯 어린 외양이었다. 동안이라고 보기에는 마치 시간 자체가 박제되어 멎은 듯 여겨지는 모습은 시시때때로 스트레스를 안겼다. 지금 이리 움츠러드는 이유에는 그것도 분명 속해있을 터다. 꽤나 커다란 지분을 가지고. 귀여워서 좋다며 사랑을 속삭여주던 남자는 그것이 절대 그녀에게 칭찬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아니, 그만 좋다 하면 이 모습도 나쁘지는 않다. 이제 그 남자는 제 인생에 있어 단 하나가 될 테니까. 그녀는 아버지에게서 제 손을 건네받는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너무 예뻐, 요코.”


  속삭여주는 말에 요코는 웃었다. 웃었다고 생각했다.




  주례는 생각 이상으로 굉장히 지루했다. 그리고 그 지루함을 뛰어넘을 만큼 축복받는 주인공으로 선 입장은 꿈꾸던 나날의 철없음을 통감할 만큼 상반되었다. 행복한 신부. 축복받는 주인공. 근사한 남편. 멋진 식장. 내심 로망이라 여겼던 것들은 막상 붉은 주단을 딛고 걸어 신랑의 팔에 제 손을 끼우며 깨달았다. 마치 맞지 않는 옷을 걸치고 어설픈 재주를 부리는 원숭이 같다고. 여자가 세상에서 가장 제일 아름다워지는 날이라 여겼던 오늘은 빛나기는커녕 우스꽝스러운 구경거리가 된 듯한 민망함과 수치심을 안겨놓았다. 뒤로는 웅성거리는 하객들의 목소리. 앞으로는 주례의 축사. 바로 곁에서 접은 팔에 그녀의 손을 걸고 있는 남자는 앞으로 이 손뿐만이 아니라 인생 모두를 걸어야 할 상대. 현실감이 없으면서도 동시에 그 무게감이며 긴장감은 현실보다도 더 생생하게 그녀를 죄었다.


  그나저나 축사는 비단 하객만 지루했던 것은 아니었나 보다. 제가 신부가 되어 맞은편에 서게 되면 분명 다른 기분일 거라 생각했건만 피곤한 몸은 물먹은 솜처럼 무겁게 늘어지는 데다 졸리기까지 해 선 채로도 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요코는 매뉴얼처럼 어느 결혼식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들을 장황하게 늘어놓고 있는 주례의 덕담을 성실하게 듣는 척 가장하며 하품이 비집고 나오려는 입술을 앞니로 얼른 물었다. 그리고 가능한 한 어깨가 들썩이지 않도록 노력하며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것으로 일단 첫 위기를 무난하게 극복했다. 아사노는 잘 견디고 있는 걸까. 지루한 것을 싫어하고 주위가 산만한 편인 그는 아마 저보다 더 못견뎌할는지도 모른다. 이미 졸고 있다 해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녀는 슬쩍 곁눈질로 아사노를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타이밍 좋게도 그 역시 꽤 지루한 눈길로 단상에 놓인 화환을 쳐다보다 저를 향해 슬쩍 눈을 맞춰왔다. 그는 눈이 마주치자 놀랐다는 듯 잠시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눈초리를 휘며 밝은 웃음을 만들었다. 주례가 직장 상사라 했던가. 아마 그래서 졸지 못한 것일는지도 모른다. 요코는 그의 웃음에 녹아 옮은 듯 미간을 작게 일그러뜨리고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아 암담한 앞길이라 해도 이 사람과 함께라면 어떻게든 헤쳐 나갈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확신을 들게 했다. 먹먹하게 굳어버린 그녀의 입술 양 끝마저 말려 올라가게 할 정도로.

  괜찮아, 선택은 나쁘지 않았어. 내게 주어진 최선이었어. 긴장감이 괜한 불안감을 만드는 것뿐이야. 높이 치솟았던 불안정한 마음은 곁에 선 남자의 웃는 얼굴, 고작 그것 하나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듯 뭉근하게 녹아내렸다. 겨우 이 정도에 가라앉을 뿌리 없는 불안증이다. 가슴이라도 다독이고 싶은 마음을 스스로 추스르며 요코는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바로 했다. 그리고 면사포며 올림머리, 장신구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뻣뻣하게 굳은 것을 가볍게 풀어주려 조금씩 움직이던 찰나. 그녀는 마치 홀리듯 시선을 빼앗겼다.


  저것도 긴장감이 만들어낸 환상일까. 눈을 의심하게 만든 것은 저 멀리서 한들한들 흔들리고 있다. 단상의 조금 떨어진 옆에 놓인 커다란 그랜드 피아노. 결혼행진곡을 연주하던 그것의 뒤에는 조화로 장식된 인테리어 조형물들이 드문드문 간격을 맞추어 놓여 있었다. 그 안에서 한들한들 흔들리는 무언가.

  식장의 공기는 진공상태라 이를 정도로 완전히 미적지근하게 식어 숨이 막힐 만큼 정적으로 굳어 있다. 어깨며 등이 드러나고 허리 아래가 풍성하게 퍼지는 드레스를 입고 있어도 마치 목 끝까지 꼭꼭 싸매고 있는 것처럼 실내는 갑갑했다. 그러니 저렇게 무언가가 바람에 날릴 일은 없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저것을 기괴하게 느낄 수밖에 없게 하는 가장 큰 이유였다. 곁에 있는 조화며 레이스, 프릴 등의 얇고 가벼운 장식물들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오직 저것 하나만이 하늘하늘 춤을 추듯 흔들리고 있었다.

  요코는 시선을 뺏긴 채 멍하니 쳐다보다 아차 하고 정신이 들어 재빨리 정면으로 고개를 수습했다. 모르는 사이에 다리를 타고, 맨 등을 적시고 스미더니 심장을 타고 다시 전신으로 스멀스멀 퍼지는 이 불안감. 시선의 끝을 잡아먹는 초조함. 다시 확인해야 한다는 위험한 호기심과 헛된 희망. 그녀는 살며시 고개를 수그려 눈을 감았다. 자그마한 체구인 데다 고개마저 내리깔았으니 잠시 눈을 감는 정도는 주례도, 아사노도 눈치 채지 못하리라.


  그녀는 차분하게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하려 애썼다. 그러나 치아는 그녀의 의지와는 반대로 입술 안쪽을 잘근잘근 씹었다. 눈을 감으니 더 선명하게 떠올랐다. 혼자서 흔들리던 그 이질적인 소품. 아니, 소품이 아니다. 그것은. 요코는 감은 눈꺼풀 안쪽에 선명히 비치는 상을 피하려 도망치듯 번쩍 눈을 떴다. 모골이 송연해졌다. 다시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싹 가셨다. 그것은 분명 사람의 손이었다.

  왜 아무도 저것을 못 보는 걸까. 피아노가 있는 구석 쪽에 관심이 없는 탓일까. 지금 저것을 알아차린 것은 나뿐일까. 왜 저기에 사람의 손이 있는 걸까. 저 뒤로는 사람이 숨을 공간은커녕 설 틈조차 없다. 손만이 고상한 장식물에 교묘하게 숨어 손짓하듯 한들한들 움직이는 모습이라니. 가끔 이상한 꿈을 꾸기는 했지만 그것이 현실에마저 개입한 적은 없었다. 왜 하필 오늘 같이 중요한 날에 저런 것을 보는 것인지 누구라도 마냥 원망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무시하라며 몇 번이고, 잘못 본 것이라 몇 십 번이고 되뇌는 사이 그리 길고 지루하게만 느껴지던 주례사는 빨리 감기 버튼을 누른 듯 순식간에 지나갔다. 지루하게 늘어진 시간을 탄력 있게 당기는 데 잡념만한 것은 없다는 것이 학생 때 이후 다시 증명되는 순간이다. 분명 무겁기 그지없는 시간이었건만 아차 하는 사이 놓쳐버린 고무줄의 탄성처럼 줄어들었다. 괜히 학생 때로 돌아간 듯한 기분으로 저도 모르게 슬쩍 웃음이 나는데 그 순간 뇌리로 이상한 것이 스쳤다.


  “죄송합니다.”

  “아니면, 그렇게나 밤놀이 다니느라 바쁜 거냐?”


  아련하게 흔적을 짚던 표정에 일순 균열이 생긴다. 아무리 말을 잘 듣고 열심히 공부해 좋은 성적을 얻어도 결코 친해질 수 없었던 고등학교 시절 영어 선생님. 그녀의 비꼬는 얼굴이 세찬 비가 되어 정수리 위로 쏟아졌다. 와그르르 웃는 시끄러운 웃음소리. 동정하지도 않고 우습다는 듯 도리어 시끄럽게 웃는 목소리에는 분명 친구라 생각했던 이의 것도 섞여있었다. 꽤나 불쾌한 기억. 아니, 하지만 뇌리를 스친 이상한 것은 그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 이전이다. 요코는 숨 막히는 불쾌감을 비집고 역행하듯 그 이전으로 나아갔다.


  “수업 중에 조는 학생이라면 많지만, 잠꼬대까지 할 만큼 깊이 자는 녀석은 처음이다.”

  “넌 학교에 뭐 하러 온 거야? 잠이라면 집에서 자면 될 거 아냐. 그렇게 수업받기 싫으면 억지로 올 것도 없을 텐데.”


  아아, 그 때 나는 잡념 때문이 아니라 깜빡 잠에 들어버리는 바람에 혼났었다. 하필은 매일 반복되던 그 악몽 때문에 며칠째 깊은 잠을 자지 못하고 시달린 통이었으니. 그래도 하필은 영어 시간이었다니, 운이 나빴다. 수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불쾌하게 머쓱하고 민망한 기억이다. 요코는 뜬금없이 떠오르는 무의식의 흐름을 막아 현실로 길을 트기 위해 가볍게 시선을 돌렸다. 이것은 그녀의 버릇과 같은 것으로, 가끔 멍하니 이상한 생각에 잠겨버리고는 할 때마다 현실로 돌아오기 위해 현재의 정경을 눈에 담아 환기시키는 것이었다. 어느 새인가 제 몸은 주례를 등지고 있다. 언제 몸을 돌렸지 싶은데 귓바퀴의 바닥에 깔려있던 반주가 점차 밀물처럼 밀려들며 점증적으로 커졌다. , 축사 다음은 축가였지

  요코는 눈을 깜빡이며 새삼 주변을 둘러보았다. 색색의 옷을 입고 새하얀 암전 속에서 빛나는 하객들. 저와 아사노를 축하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었다. 과연 진심으로 축하하기 위해 찾은 이가 몇이나 될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게다가 너무 하얘 오히려 새까만 것만 못한 배경들 저 너머로 빛나는 사람들의 자그마한 움직임은 빛에 반사되어 몇 배는 더 화려하고 커보였다. 마치 사람이 아닌 것들이 번뜩이며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했다. 새까맣게 죽어버린 공간. 그 너머에서 춤을 추며 다가오는 이형의 무리들. 요코는 순간 입을 틀어막았다. 그 악몽. 고등학교 시절 행방불명을 당하기 직전 계속 저를 괴롭혔던 악몽. 그 느낌이며 감정이 생생하게 살아있는데 비해 항상 내용은 기억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이 지금 와서 둑이 터지듯 밀려들었다. 판도라의 상자와도 같은 불온하고 불결하고 불쾌하지만 동시에 어딘가 이율배반적인 설렘으로 가득 찬 악몽이 살을 저미듯 싸고돌았다.


  “…….”


  순간 무릎이 탁 꺾이는 느낌이 들며 머리가 아찔해졌다. 온몸의 피가 회오리치며 빠르게 전신 구석구석을 타고 돌아 사지의 끝마저 저릴 정도였다. 무의식적으로 도망쳐야 한다는 강박과 외침에 몸이 멋대로 반응했던 그 날의 영어 시간과는 달리, 지금의 그녀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 다만 몸이 허물어지는 벽처럼 무너지는 것을 간신히 버티는 것이 전부였다. 요코는 아사노의 팔에 기댄 채 힘을 주었다. 주륵, 하고 기대어 미끄러지며 무게감 있게 팔을 누르는 것에 놀란 그는 눈만으로 옆을 돌아보았다가 깜짝 놀란 채 고개를 전부 돌려 내려다보았다.


  “요코, 괜찮아?”


  이마 끝에 자잘하게 맺힌 식은땀을 조심조심 손끝으로 훔쳐 주고는 걱정스럽게 바라본다. 그제서 제가 땀마저 흘리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요코는 입술을 얇게 깨물며 어떻게든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지 않다 해도 어쩔 수 없음을 안다. 일생의 진정한 시작을 알리는, 저와 아사노 뿐만 아니라 양가 어른들에게 역시 다시없을 중요한 자리임을 안다. 아사노는 이리저리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 요코가 걸고 있던 팔짱을 풀어내고 그녀의 허리를 그러안는 체 제 품으로 부축해 받쳐놓았다. 행복한 신랑신부의 애정표현처럼 저를 끌어안는 아사노에게 기대니 그나마 주저앉지 않고 버틸 수 있을 듯했다. 요코는 핑 도는 머릿속 이지러지는 정신을 제대로 붙잡기 위해 깊이 눈을 감았다가 떠올렸다. 그런데 그 손이.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잊고 있던 손이 시선의 정면으로 들어왔다.

  그것은 여전히 저 너머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다만 기분상의 탓일는지 모르겠지만 살랑살랑 팔랑거리던 것은 마치 금방이라도 갈구하는 것을 손아귀에 담아 넣고 싶어 하는 것처럼 어딘가 조급해보였다. 확실히 제 신경이 과민한 것일 터다. 기분에 따라 달리 보이는 손은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않은 채다. 모두의 시선이 피아노 앞에 서 축가를 부르고 있는 이에게 닿아 있다. 그렇다면 누구 하나쯤은 저 손에 대해 발견해주지 않을까. 같은 것을 보고 웅성거려주지 않을까. 누군가 대신해 확인해주지 않을까. 환상이 아니라고, 간혹 꿈에 나오던 그 이상한 이형의 괴물들 중 하나가 아니라고 확신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축가가 1절이 끝나고 간주로 접어들 때도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호응할 뿐 찜찜한 낌새는 없었다. 이럴 리 없어. 그리 부정하고 억울해하면서도 동시에 무너지듯 저를 탓하며 납득하는 것 말고는 요코에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다만. 다만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요코는 기대듯 아사노의 가슴에 부케 든 손을 얹으며 그의 어깨로 고여 놓았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가 이런 화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잘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상하고 기이한 것. 평범하지 않은 것. 그런 것을 혼자서만 본다는 것. 요코로서는 견딜 수 없었다. 납득하면서도 동시에 드는 반발심을 바보 취급을 당하더라도 누르고 싶었다.


  “아사노, 저기…….”

  “이쿠야.”

  “?”

  “언제까지 아사노라고 부를 셈이야. 이제는 너도 아사노라고?”


  아아, 그러고 보니. 요코는 희미하게 얼굴을 붉히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렸을 때부터 늘 알고 지냈지만 이상하게 껄끄러워 이름을 부를 수는 없었다. 사춘기를 지나면서부터였던가. 이리저리 잘 피해왔다고 생각하지만 이제는 꼼짝없이 그를 이름으로 불러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그의 말마따나 이제는 저도 아사노이기에.


  “이쿠야, 있지. 저기 뭐 이상한 거 보이지 않아?”


  생각해보니 이 거리, 너무 가깝지 않나. 내려다보는 아사노를 올려다보며 요코는 불현 듯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런 접촉을 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허리를 끌어 안겨 옆구리에 착 달라붙은 채 그마저도 그에게 바짝 기대어 섰으니 내려다보는 아사노와 제 얼굴 사이의 거리는 상당히 가까웠다. 이미 속삭이는 숨결마저 닿고 있었다. 이제야 생각이 미쳤다. 요코는 새삼 그의 시선을 피하며 슬그머니 몸을 물리려 작게 달싹였다. 하지만 아사노는 그녀가 불편해한다 여긴 것인지 다시 편하게 그러안으며 기댈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아니, 이게 아닌데. 요코는 뺨으로 열기가 뭉치고 있음을 느끼며 어깨를 움츠렸다. 그녀가 다른 생각에 잡아먹힌 동안 그는 별 것 아니라는 듯 그녀의 시선이 가리켰던 곳을 향해 눈길을 던졌다. 그리고 가볍게 미간을 찌푸려 멀고 가까운 곳들을 쭉 둘러보았다. 하지만 별로 마음에 걸리는 것은 발견하지 못한 것인지 다시 요코를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그녀도 긴장하여 초조한 마음으로 팔을 꼭 끌어안고 있었다.


  “뭐 이상한 거라도 있어?”


  그리 묻는 아사노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요코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저렇게 선명하게 보이는데, 물론 색색의 꽃들에 둘러싸여 좀 신경 써서 봐야 하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분명 눈에 확 띄는데 눈치 채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저것은 제게만 보이는 것일까. 설령 지금 보고 있는 것을 말한다 해도, 자세히 설명한다 해도 그는 믿어줄까. 만에 하나의 기적으로 저것을 발견해줄까. 아니, 그럴 리 없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별 것 아니었다며 얼버무려야 할까?


  “저기 사람 손 같은 게…….”

  “요코.”


  저질렀다. 그제서 섬뜩하게 등줄기로 식은땀이 쭉 내리는 것을 느꼈다. 저질러버렸다. 요코는 무겁게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얼버무리기로 해놓고 결국은. 바보 같다. 너무 한심해서 뒤늦은 변명의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미안해, 내가 널 배려하지 못했어.”


  그런데 진지하게 눈을 맞추고 하는 이야기는 뜻밖이었다. 그녀는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허황된 환상을 좇는다는 면박은 없었다. 오히려 그 말은. 희망어린 눈길을 맞고 그는 웃으며 말했다.


  “여자들은 결혼식 때 많이 예민해진다던데. 내가 깜빡했어.”


  그리고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감각이 찾아들었다. 요코는 멍한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니까, 발견했다는 것도 아니고 이해한다는 것도 아니고……. 요코는 망연하게 흐린 웃음을 내었다. 결혼식에 대한 스트레스로 예민하게 달아올라 환각을 본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조금이나마 가졌던 찰나의 기대 조각은 형체도 남기지 않고 바스러져 허공중에 흩어졌다.


  “그래도 오늘은 좋은 날이잖아. ? 요코.”

  “……으응. 미안해. 내가 좀 긴장했었나봐.”


  살살 구슬리듯 달래는 그의 말에 요코는 흐린 웃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곁눈질로 슬쩍 돌아보는 피아노 너머에서는 여전히 손이 흔들리고 있었다.



상하로 나뉩니다






와.. 너무 오랜만이네요... 

너무 오랜만이라 글을 제가 어떻게 썼는지도 까먹었고 어떻게 올렸는지도 까먹어서 이미 올린 게시물들 참고해서 올립니다ㅋㅋㅋㅋㅋ

마지막 연성글로부터 어언.. 어언... 1년 반이네요ㅋㅋㅋ 대박^^

그 이전부터도 스터디 아니면 전혀 글을 안 쓰고 있기는 했지만 글을 아예 안쓴지 어언 1년 반이 되는군요^^!!

제 자신이 나름 어떤 문체와 분위기를 가지고 글을 썼던 건지도 잊었고 나름 가지고 있던 사용 어휘조차 잊었습니다.

묘사를 어떻게 했더라^^....ㅜㅜㅜ

덕분에 제가 한동안 페이스를 찾으려 애쓸 때까지는 지난 연재작들의 후편은 보류될 듯합니다.

분위기가 너무 달라져서 하나의 글이 아닌 것처럼 양분되어 버릴 것 같아서 이전 글들을 읽어보고 또 읽어보고 해야 할 것 같아요.


일단 잡담은 각설하고 이 글 얘기를 해보자면ㅋㅋ

쇼류요코 내걸고 웬 아사노와의 결혼이냐며 분노하실 분이 계실는지 모르겠지만 전 아사노와 요코의 커플 조합을 겁나 싫어합니다.

그러니 일단 안심하시라는 말씀부터 올리겠습니다^q^ 전 오로지 제 취향 아니면 망상조차 불가능합니다^^!!!!!

여튼 이 글은 아사노와 유카는 사귀지 않았으며 아사노는 고딩 때 식에 휘말리지 않았다는 전제로 시작합니다.

나름의 깨알설정이 있다면, 유카는 봉래에 반년만에 돌아왔기 때문에 행방불명에 대해 요코에 비해 비교적 조용히 묻혔고,

요코가 봉래로 돌아오자마자 유카를 찾았던 건 십이국에 대해 아는 건 유카 뿐이라는 걸 봉래에 막 떨어졌을 당시에는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금 와서는 상세의 기억을 전부 잊지만요ㅋㅋ 

유카는 요코가 자라지 않는 모습에 대해서도 이해하고 있고, 요코가 언젠가 돌아가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기억을 잃은 요코에게 억지로 끄집어내는 것도 리스크가 있을 것 같아 그저 요코의 곁을 지키며 요코를 구하러 올 측근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타이키 때를 통해 상세의 원조는 굉장히 늦는다는 걸 알아서 느긋하게 기다리려 하고, 

케이키나 엔키, 연왕의 모습이며 요코에 대한 호의적 태도를 아니까 그들이 요코를 구하러 오지 않을까 막연히 기대하지만

나라를 다스릴 수 없는 요코의 목숨은 풍전등화라는 걸 알아 시간이 갈수록 걱정이 점점 늘어가고 있어요.

그래서 유카는 요코가 부모님의 제재에 아무 것도 못하고 주눅드는걸 안타까워하면서도 동시에 언제든 여기서의 삶을 접고 떠나야 하는 걸 아니까

요코를 정서적으로 지지해주되 이 환경에서 능동적으로 벗어나게 해주려 하지는 않아요. 자기 뿐 아니라 아사노라는 정서적 지지 장치가 하나 더 있으니까요.

이것저것 벌려놔서 여기서의 삶에 무게가 생기게 되면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돌아가야 하는 요코의 발목을 잡을 테니까요.

그런데 요코는 뜻밖에도 아사노라는 정서적 지지원과의 결혼을 통해 현 상황에 대해 벗어나려 하고

유카는 요코가 봉래에서 가정을 만들며 무엇보다도 커다란 무게를 실으려는 상황에 걱정이 많아져요. 

가정, 남편, 아이가 생기게 되면 요코가 그들을 버리고 나라를 다스리러 다시 돌아갈까, 싶고 그 질문에 긍정이든 부정이든 요코에게는 상처가 될 테니까요.

그래서 식장에서 불안해하는 요코를 보고 묻죠. 괜찮냐고. 자기는 적극적으로 반대할 수가 없으니까요.


제가 왜 이걸 줄줄이 늘어놓냐구요?

당연히 본편에서 나오지 않기 때문임미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귀찮아서 이부분 다 생략했어요.. 뀨잉뀨잉 ㅇㅅㅇ

여튼 조연인 유카의 이야기는 여기서 다 풀었으니 본편에서는 주연인 요코의 얘기만 풀겠습니다.

하편도 거의 썼으니까.. 이번 주말쯤에는 올리지 않을까 싶어요!


근데 누군가는 찾아주시겠지 하는 생각으로 저렇게 줄줄이 썼는데 정작 이 블로그 나만 들어오면 어쩌지..^.ㅠ




  운해의 바람은 싱그럽다. 사실 꾸덕꾸덕한 짠 내음이 묻은 바다 냄새를 싱그럽다 하는 것에 어폐가 있으나 구중궁궐 깊이 틀어박혀 있다 간신히 벗어나는데 상쾌하지 않을 수 없다. 주인 없는 능운산은 왕의 소유다. 선대 경왕들이 갖가지 화려한 별궁을 지어놓았고 지금도 운해 위로 군도처럼 보이는 저 산정에는 주인 된 자의 왕림을 기다리며 여관들이 살뜰히 그것을 관리중이라 했다. 언젠가 삼공에게서 들었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그 중 누가 말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리라.

  요코는 눈앞으로 보이는 군도의 위엄에 고개를 숙이는 기수의 등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눈앞에 보이는 덩어리들은 요천산을 벗어나 봐왔던 수많은 섬 무리들에 비해 가히 웅대하다 이를 정도다. 이것에 비견되는 것은 딱 하나 보았다. 바로 떠나온 금파궁이 앉아있던 요천산, 한 나라의 수도 위로 솟은 능운산이었다. 그렇다면 저것 또한 한 나라의 수도라는 것이 된다. 요코는 안주국 관궁산 정상을 끼고 돌아 금문을 향해 하강했다.

  “어서 와, 요코.”
  “오래간만이에요.”

  궁궐의 금문은 금禁한다는 글자를 써 궁의 주인인 왕과 재보가 아니면 그 출입을 막는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러나 엄중히 출입을 통제하는 금문이라 해도 반드시 왕과 재보만이 이용하는 것만은 아니다. 예외조항 때문이다. 금문은 특별히 왕이 허락한 자에게만큼은 열리고는 했다. 즉 금문은 ‘왕과 재보, 허락받은 자들을 제외하면’ 엄중히 출입이 통제되는 궐문인 셈이었다. 그리고 타국의 왕인 요코는 현영궁의 주인에게 허락받은 몇 안 되는 특권층 중 하나였다. 물론 남쪽에 위치한 그녀의 나라에서 북쪽에 있는, 게다가 북쪽을 향한 현영궁의 금문을 이용하는 것은 오히려 귀찮은 일이기는 했으나 정문을 밟고 들어가 대신들의 요란한 환영의례며 복잡한 수속을 밟느니 특혜를 마음껏 즐기는 것이 차라리 나았다.

  “경은 별 일 없고?”
  “이미 알고 계실 텐데요.”
  “요컨대 상투적인 안부인사라는 거지.”

  강렬하게 빛나는 황금을 녹인 듯 화려한 금빛 머리칼을 허리까지 길게 늘어뜨린 열셋 남짓의 소년이 낄낄 웃으며 그녀와 나란히 내궁을 걸었다. 현영궁에 오면 보통은 천관이나 하관이 추관에 알려 그쪽의 안내를 받는 것이 통상이었으나 현영궁에 들를 때는 그 과정이 늘 생략되고는 했다. 왕이나 재보, 혹은 추관의 장인 대사구가 직접 마중을 나오고는 했던 것이다. 예를 따지지 않고 귀하고 반가운 손님을 버선발로 맞는다는 의미가 다분하니 으레 내심 기뻐지고는 했다. 

  요코는 저보다 어려 보이지만 훨씬 연치 높은 재보의 웃음에 같이 동조하며 은근히 주변을 살폈다. 아무래도 맞으러 온 이는 연타이호 한 분뿐인 듯 했다. 저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안국 왕의 모습이 숨는다고 숨겨질 리는 없다. 그래도 바쁘거나 출궁한 때가 아니라면 늘 나서서 기쁘게 맞아주고는 했던 그였기에 모습을 바로 볼 수 없는 것은 아쉬웠다. 그리고 이 광경을 함께 볼 수 없는 것은 섭섭했다. 그녀는 웃음을 애써 눌러 참는 얼굴로 슬쩍 엔키를 내려다보았다.

  소년은 명랑하게 밝던 웃음을 어디로 구겨 넣은 것인지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뒷목을 잡아 채일 거라 생각하는 것인지 턱 아래로 바로 어깨를 붙인 채 슬금슬금 성큼성큼 잰 걸음을 놀리고 있었다. 궁의 또 다른 주인인 기린이 저자에 붙은 방 앞을 지나가는 수배자처럼 구는 것은 꽤나 재미있었다. 연왕도 함께 마중을 나와 주셨다면 분명 같은 행동을 보였을 터다. 주종이 나란히 슬금슬금 성큼성큼. 요코는 소년이 그런 이상한 모습을 보이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적극 동참하지는 않아도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기 위해 턱에 바짝 힘을 주었다.

  한 나라에는 단 한 명의 재보가 있다. 한 마리라 해도 좋다. 사람으로 변하기도 하지만 그 본성은 짐승, 아니 짐승이라 뭉뚱그리는 것은 지나친 무례다. 신수라 함이 옳다. 왕을 선정하는 단 하나의 상서로운 생물. 어질고 선하고 자비로운 그 짐승은 왕을 선정하고 또한 지키기 위해 영험한 힘을 가진다. 머리도 똑똑한 편이라 왕을 선정한 이래 재보의 벼슬을 맡아 최측근에서 보좌한다. 또한 이변이 없는 한 반드시 금빛 머리칼, 갈기를 가진다. 지금 요코의 바로 곁에 있는 이 오백년 묵은 열셋 소년처럼.

  “슈코우 씨들은 많이 바쁜가요? 후궁을 지나는 김에 안부 인사라도 드리는 건.”
  “뭐?! 됐어, 됐어. 가려면 요코 혼자 가. 난 싫어. 절대 싫으니까.”

  새하얗게 빛나는 부드러운 피부가 금방이라도 핏기를 잃듯 창백해진다. 그리고 생각만으로도 질린다는 듯 걸음이 빨라졌다. 

  금문을 넘어 궁으로 들어오면 가장 먼저 닿는 곳이 바로 연침 후궁이다. 왕의 가족이 거주하는 공간이지만 금파궁과 마찬가지로 현영궁도 후궁은 불필요했다. 그것은 두 사람의 출신과도 관계가 깊었다. 섞여서는 안 되는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의 경계에 일시적으로 구멍이 나는 것을 식이라 하고 그 식에 의해 저쪽 여자의 태내에 자리 잡고 태어나게 된 이쪽의 아이를 태과라 한다. 연왕 쇼류와 경왕 세키시는 태과 태생이었으며 서약을 받아 왕위에 오를 때 두 사람은 혈혈단신으로 이쪽에 건너왔다. 평범한 저쪽의 사람이 식을 넘어 무사히 이쪽에 올 확률은 드물었을 뿐더러 당시 그럴 만한 사정도 되지 않았다. 이쪽에 와서도 가족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으니 어찌 보면 쇼류나 요코나 고아인 셈이었다.

  덕분에 후궁은 제 역할을 해낼 수 없어 그대로 빈 전각이 되었는데 그 쓰임새는 왕이 조정 신료들과 의논하여 본 목적에서 벗어난 용도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실패한 예를 들자면 요코의 경우 난민을 위한 임시보호소를 짓고자 하였으나 궁중 법도를 무시할 수는 없다는 신료들의 반대에 부딪쳐 기각되었다. 그러나 성공한 예도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쇼류의 경우였다. 그는 최측근이 신분이나 벼슬의 고저에 구애받지 않고 저와 정치를 논할 수 있도록 특별히 후궁을 내어주었다. 물론 반대하는 목소리에 꽤나 얻어맞았지만 그에게는 가히 맷집이라 이를 정도의 강력한 추진력이 있었고, 대신들의 원성을 귓전에 이는 날파리 쫓듯 무시했다. 그리고 세월을 흘릴수록 그들의 말을 들을 것을 그랬다며 꽤나 후회 중이었다.

  이유는 바로 옆에 있는 기린이 증명하고 있었다. 쇼류나 그의 반신인 엔키나 궁을 얌전히 지키고 있을 수만은 없는 자유로운 영혼들을 타고났기 때문에 당연히 제관들의 경계대상이 되었다. 신분에 구애받지 않도록 베푼 것은 연왕 본인이었으나 그것은 제 묫자리를 스스로 파다 못해 직접 들어가 드러누운 꼴이었다. 측근들은 지극할 정도로 그에 순종했다. 주인의 목에 새끼줄이라도 걸어 궁에다 묶어두고 싶어 안달하며 잔소리를 줄줄이 늘어놓았던 것이다. 그러니 가장 믿음직스러운 신하들이 가장 두려운 천적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쇼류는 모르겠지만 엔키는 후궁을 지날 때마다 반사적으로 움츠러드는 자신에 대해 미처 자각하지 못한 것 같았다. 얘기하면 신경 쓸 것이 훤하니 절대 얘기해주지는 않겠지만. 요코는 속으로 마저 웃음을 삼켰다.

  측근은 바람 같이 제멋대로 구는 주종을 잡기 위해 꽤나 엄격한 편이니 연왕이나 엔키에게 있어 그들은 믿을 수 있는 신료임과 동시에 벗어나고 싶은 굴레고 사슬이었다. 지은 죄도 없이 움츠러들게 하는 잔소리꾼들이라며 학을 뗀 소년은 연침을 거의 날 듯 벗어났다. 요코는 후궁을 벗어나기 무섭게 자라목처럼 움츠렸던 어깨를 쭉 펴고 고개를 드는 재보를 보며 다시 한 번 웃음을 참았다. 마치 무슨 결계라도 있는 양 한 발자국 차이로 저리 태도가 바뀌는 것을 보면 역시 웃음을 참기 어려웠다. 

  “그런데 현영궁에는 웬일이야? 한동안 바빴잖아?”

  엔키가 재빨리 화제를 돌린다. 측근에 대한 얘기는 저만치 멀리 치워놓고 싶음이 분명했다. 그 꼬리를 물어 짓궂은 장난이나 쳐볼까. 싫어하며 울상을 지을 모습이 눈에 선해 벌써부터 웃음을 참을 수 없다. 하지만 그것도 어쩌다 한 번이지 자주 하면 재미도 없을 테고. 원래부터도 남이 싫어하는 것을 굳이 무리하게 들이미는 성격도 아니다. 고민하던 요코는 이 기린을 가엾게 여기기로 했다.

  “제게도 나름 유능한 신하들이 있으니까요. 당분간 제가 있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맡겼죠.”
  “잘했네. 그거 왠지 어딘가의 누구 씨를 닮은 것 같기도 하지만.”
  “연왕처럼 유사시에만 있으면 된다는 건 아직까지 아니에요.”

  칼같이 답하며 부정하는 요코를 장난기 어린 자안이 빤히 올려본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리 묻는 눈길이다. 태사는 관이 있으면 왕이 해야 할 일의 대부분은 끝난다 했다. 연왕이 말했던 믿을 만한 신하를 뽑는 것이 중대한 일이라고 했던 부분과 일맥상통이었다. 그 스스로 온몸으로 증명해보이고 있는 셈이다. 유능한 신하를 뽑아 일을 맡기니 왕이 옥좌를 비우고 하계에서 쉬엄쉬엄 시간을 보내도 문제없이 나라는 유지되었다. 그러나 제 손으로 뽑은 관료들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요코는 저 스스로 느끼기에도 걱정이 너무 많았다. 아직 배워야 할 것도 많고 옥좌에서 너무 멀리 벗어난다 싶어지면 그새 무슨 일이라도 생기는 것이 아닌지 마음이 불안했다.

  “아직까지, 라고 하는 걸 보면 요코도 머지않았어.”

  요코는 자신만만하게 팔짱을 끼고 단정하듯 올려다보는 엔키를 쳐다보았다. 소년은 그녀가 걸음을 멈추었음에도 불구하고 뒷짐을 지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앞서나갔다. 그녀는 잰걸음으로 소년을 따라잡으며 슬쩍 물었다.

  “그럼 저 좀 위험한 건가요?”
  “글쎄. 왕이 되먹지 못해도 수족들이 쓸 만하면 나라는 잘 굴러가. 쇼류만 봐도 알잖아?”

  언제나 그렇듯 제 주인을 과소평가하는 기린의 한 마디가 요코로 하여금 쓴 웃음을 짓게 했다. 왕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안목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조금씩 배워가고 있었다. 앞을 내다보고 사람과 현상을 꿰뚫어보는 것이야 말로 그것들을 다스릴 제가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쇼류에게는 그것이 있었다. 설렁설렁 대충대충 귀찮다는 듯 굴지만 나른한 시선에는 보이지 않는 칼날이 들어있었다. 정확하게 수를 읽고 앞을 내다보고 오차 범위를 탐색하고 가능성을 살펴 방비한다. 왕으로서는 이만한 인재가 없었다. 그러니 어쩌면 쇼류를 닮아간다는 재보의 말은 비꼬기보다는 칭찬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도 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녀는 소리 내어 웃었다.

  “아참, 락슌은 요즘 시험기간이야.”
  “네? 그런 말 전혀 없었는걸요.”
  “뭐, 시험이라기보다는 공모전이라고 해야 하나.”

  아아. 요코는 실망한 기색을 바로 얼굴에 드러내었다. 공모전이라고는 해도 시험기간이라 이를 정도니 이런 때 락슌을 만나러 간다면 그의 시간을 빼앗는 꼴이 될 것이다. 그것만큼은 결코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모처럼 보고 싶어 관궁까지 왔는데 보지 못하고 가려니 서운했다.

  “대놓고 그런 표정이라니. 한두 번 봐줘버릇하니 꽤 뻔뻔해졌는데?”

  그 와중에 엔키가 일침을 날렸다. 요코는 뒤늦게 튀어오르듯 화들짝 놀랐다. 저도 모르게 얼굴에 드러나버린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애써 시선을 피하며 뭐가요, 하고 슬쩍 잡아떼었다. 하지만 뻔히 보이는 것을 못 본 체 해주는 귀여운 구석은 소년에게 없었다.

  “현영궁을 환승구간으로 이용하고 있잖아?”

  역시. 모를 리는 없었나. 요코는 어색하게 웃으며 들켰어요, 하고 물었다. 하계를 이용하면 왕복으로 오고 가며 길에 버리는 시간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요코는 운해를 이용해 현영궁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슬쩍 안부를 물으러 온 척, 자문을 구하러 온 척 예의상 하룻밤 정도 머물다 관궁으로 내려가 친우와 며칠을 놀다 돌아오는 것이었다. 물론 돌아올 때도 현영궁으로 올라와 관궁 시내에 대해 이야기하며 핑계를 대고 운해 위를 이용했다. 그러나 한두 번이면 그러려니 해도 매번 그런 식이니 그 얄미운 모습을 알아차리지 못할 리는 없었다.

  “뭐, 그러면서 요코가 현영궁에 들러주니까 난 좋지만. 쇼류도 꽤 좋아하고 말이야.”

  꽤나 얌체 같은 행동이라는 것은 스스로 자각하고 있었다. 그래도 눈감아주시는 동안 이 혜택을 마음껏 양껏 이용하자고 생각해왔다. 물론 양심에 조금 거리끼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운해 아래의 육로를 이용하기에는 운해상이 너무나도 유혹적이었다. 그런데 앞으로도 쭉 이용하렴, 하고 허락을 해주니 마음의 짐을 더는 기분이었다. 요코는 엔키가 말을 바꾸기 전에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활짝 웃었다.

  “고마워요, 로쿠타.”
  “꼭 이런 때만 이름을 불러주지.”

  엔키가 샐쭉하니 짐짓 얄밉다는 듯 노려보며 말했다. 엔키는 안국의 기린이라는 의미를 담은 호號일 뿐이었고 보통 기린은 주인이 지어주지 않는 이상 이름이 없었다. 로쿠타는 특수한 경우로, 봉래 태생이었기 때문에 이름을 얻은 것이었다. 소년은 이름으로 불리는 상황이 많지 않다 보니 동등하고 허물없이 친한 요코에게 이름을 불러달라 몇 번이고 청했지만 정작 그녀는 소년에게 타이호, 하며 꼬박꼬박 경칭을 하고는 했다. 

  “그런데 연왕께서는 내전에 계신가요?”

  요코는 얼른 말을 돌리려는 듯 내전 쪽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 뻔히 보이는 속을 누가 모르겠냐마는 로쿠타는 순순히 응해주었다.

  “아니, 그 녀석은 하계에 내려갔어.”
  “하계에요?”
  “응. 류 쪽이 심상치 않다고 보고 온다나?”

  핑계지, 뭐. 그렇게 사족은 덧붙이지만 엔키의 얼굴은 심각해져 있었다. 요코는 조심스레 안색을 살피다 운을 떼었다. 그녀 역시 류 쪽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기는 했으나 나라 하나를 건너 있는 류의 사정이 아무래도 바로바로 귀에 들어오는 것은 어려웠다.

  “무너지는 양상이 많이 다르다 들었어요. 이제야 본격적으로 가시화되기 시작한 건가요?”
  “응. 요즘 조의에서는 거의 류와 접경한 북방지역 얘기뿐이야.”

  솔직히 말해 정신없어. 소년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보통은 왕이 실도하면 황폐가 시작되고 옥좌가 비워지고 나서야 천재지변과 요마가 나라를 침범해 황폐에 가속이 붙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류는 그 ‘보통’의 범주에 속하지 않았다. 저야 그런 것에 대해 아직 잘 모르지만 오랫동안 여러 나라와 왕조의 흥망성쇠를 지켜본 연왕이 한 말이니 믿을만했다. 여하튼 속으로 곪던 과실이 이제서 터진 것이 분명했다. 가시화되기 시작하자 파도에 밀린 모래성이 허물어지듯 감당할 수 없는 빠르기로 황폐가 가속화된 것이리라. 미리 방비해두고 있었으니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렇다고 마냥 여유로운 입장도 아니었다.

  “혹시 벌써 난민이…?”
  “아니야. 아직 그 정도는 아닌데 국경을 접하고 있는 이웃이니 일단 난민이 밀려온다 싶을 때 손을 쓰면 너무 늦잖아. 그러니 저러는 거겠지.”

  마치 남 얘기를 하는 듯하다. 재보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 일종의 명예직이니. 엔키는 보고 들은 것, 추정하는 것을 가감 없이 전해주는 것이었다. 요코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교는 아직 경이 감당하기 어려워 접경지역을 가능한 한 돕고 있으나 거의 대부분은 안이 물자를 대는 형편이었다. 주가 나서주어 최근에는 교에서 손을 많이 뗀 참이지만 대와 류만으로도 안은 현재 꽤나 버거운 상황이었다. 그나마 대는 허해가 버티고 있었고 류는 이상할 정도로 황폐의 조짐이 늦었지만 이제서 와르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고충이 눈에 선히 보이는 듯싶었다.

  “저 때도 굉장히 많이 신경 써주셨지요.”

  요코는 쓰게 웃으며 대꾸했다. 국경을 접했으며 타국의 백성이라 해도 백성은 백성이라는 것 자체만으로도 안타까운 존재다. 도울 수 있다면 자국 백성을 보호하는 한에서 최선을 다해 돕는다. 그 부분에서 쇼류와 요코의 생각은 일치했다. 그녀는 국경을 접했기 때문에 다행이라고 안도했지만 도움을 주는 입장 쪽에서 생각해보니 이것은 꽤 부담스럽고 어려운 일이었다. 로쿠타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다 말고 아차, 하듯 요코를 올려다보았다.

  “아, 그건 아니야. 경은…”

  말을 이으려던 찰나 요코가 말을 끊고 들어왔다.

  “그렇다면 당분간 환궁 일정은 미지수겠네요.”

  엔키는 입을 벌린 채 잠시 넋 놓고 있다 퍼뜩 고개를 끄덕였다. 음, 아무래도 바로는 힘들 거야. 류로 넘어갔다 올 생각이라고 했으니까. 

  “여기서부터는 혼자 갈게요. 이제 현영궁도 익숙하니까.”

  요코는 싱긋 웃었다. 어느새 두 사람은 인중전으로 뻗은 갈림길 앞에 서있었다. 로쿠타는 슈코우를 불러줄까, 하고 물으려다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대사구를 부를 때까지 인중전에 그녀를 앉혀놓고 기다리느니 차라리 먼저 보내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손님이라고는 해도 요코니까. 로쿠타는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한 그녀를 향해 부르듯 말을 던졌다.

  “이따 저녁 같이 먹을래?”

  돌아본 요코는 작게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별이 부서지는 밤이었다. 하계의 날씨는 운해의 흐름에 따라 꽤나 변화무쌍했지만 구름 위로 둥둥 뜬 섬의 세계에서는 변화가 그리울 만큼 지루하고 안온한 날씨가 이어졌다. 구름조차 찾기 어려울 정도로 맑은 밤하늘은 뙤약볕에 빛나는 흰 모래를 듬성듬성 뿌려놓은 것처럼 은은히 희게 빛났다. 요코는 당실의 의자를 낑낑대며 하나 빼어들고 노대로 나왔다. 하늘도 바다도 시간이 지날수록 처음 보았을 때의 설렘이 수그러들었으나 희한하게도 그 감동만큼은 희미하게 남아 가끔 새벽별처럼 빛나고는 했다. 오늘도 그런 날임에 분명했다.

  이동을 염두에 두지 않고 만든 의자는 꽤나 무거운 고급 가구였다. 요코는 두 팔로 의자의 등받이를 끌어안다시피 하고 간신히 노대에 끌어다 놓았다. 내려놓고 나니 팔이며 어깨가 미미하게 얼얼했다. 그것을 가볍게 번갈아 주무르며 요코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금파궁이었다면, 잔소리꾼 천관이 옆에 있었다면 아마 그들의 얼굴을 붉게 물들였을 지도 모른다. 오금이 의자에 닿을 듯 말듯하게 가까이 다가서 무릎을 굽히되 허리를 과하게 숙이지는 않고 옷에 주름이 잡히지 않도록 의자 깊숙이 물러난다는 느낌으로 소리를 내지 않고 앉아야 한다. 아마 그런 식으로 떠들어댔겠지. 현영궁이라 다행이다. 그녀는 가슴이 뜰만큼 크게 숨을 들이켜고 난간 밖을 향해 천천히 내쉬었다. 바다 위로 그녀의 한숨이 얹히는가 싶더니 바로 흐물흐물 녹아 옅어지고 사라졌다.

  ‘마음에 들었다면 경왕에게는 노대가 있는 방을 준비해주도록 하지.’

  가슴이 한 차례 지끈 내려앉았다. 왜 갑자기 그때가 떠올랐는지 알 수 없었다. 이곳이 그의 궁전인 현영궁이기 때문일까. 늘 이상한 감동을 주는 운해를 내려다보니 멋대로 처음 보았던 순간의 기억이 돋은 것인지도 몰랐다. 아니, 요코는 정확한 답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회피하기 위해 열심히 그럴듯한 변명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제 감정을 묵묵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요코는 아까부터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생각하고 있었다.

  첫 만남에서는 목숨을 구해 받았다. 요마의 뿔에 받히거나 발에 깔릴 뻔했던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그는 태도를 빼어 잡고 휘둘러 그녀의 목숨을 구했다. 그리고 착왕의 눈과 손으로부터 보호해주었고 군사를 내어 케이키와 나라를 되찾을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왔다. 왕이 될 수 있도록 지지하고 격려하되 무리하게 몰아붙이지는 않고 제 의사를 가장 먼저 존중해주었다. 왕이 되지 않았다면 어디선가 비명횡사해야만 했던 요코의 사정상 이 또한 목숨을 구해 받은 격이었다. 왕이 된 이후로도 나라가 빨리 안정될 수 있도록 물자를 지원하고 사적으로 들러 경험에 입각한 솔직한 조언을 아낌없이 내어주었다. 멋대로 지른 오만한 요구에도 그는 잠시 인상을 찌푸렸을 뿐 총대를 메고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 외에도 작은 부분 하나하나에서 그는 섬세하게 그녀를 챙겨주었고 또한 져주었다. 그래서였다.

  내가 멋대로 착각을 해버린 건지, 그분이 나를 착각하게 만들어버린 것인지. 요코는 선뜩한 불쾌감이 구물거리는 명치를 손바닥으로 감싸듯 얕게 내리눌렀다. 너무나도 상냥했던 언행들, 과분한 친절들. 그것들은 어느새 특별함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저로 하여금 내심 단정 짓게 했다. 이건 내게만 국한된 호의가 아닐까. 어느 날 엉뚱한 세계로 뚝 떨어진 나를 위해 준비된, 나만을 위한 영웅이 아닐까. 

  요코는 미간을 찌푸렸다. 깊이 들이쉬고 내쉬는 숨에는 아까와는 다른 떨림이 묻어 있었다. 격정적으로 끓어오르는 토기 어린 부끄러움이 얼굴을 홧홧하게 태웠다. 전신이 감전되는 것처럼 조금씩 저려왔다. 

  쇼류는 류에게도 같은 것을 베풀려 하고 있었다. 옥좌의 부재. 관리의 횡포. 요마의 등장. 황폐의 가속. 도탄에 빠진 백성들. 그는 언젠가 말했다. 나는 안의 몸종이지만 타국의 일까지 정리해줄 의리는 없다고. 그리고 그의 반신은 말했었다. 요코 때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참견해댔잖아? 비록 그 뒤에 결국 네게 문제가 되는 건 난민이었다며, 국경을 접한 경의 난민이 유입되면 안이 힘들어지니 나섰던 것 아니냐며 반신은 차갑게 제 주인을 몰아쳤지만 요코에게는 이러니저러니 하면서도 제게 많은 관심과 참견을 쏟았던 쇼류의 모습만이 인상 깊게 남아 있었다. 그래서 류에게 같은 것을 베풀려는 쇼류의 모습은 그녀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런 감정을 느낀 순간 그녀는 더욱 당혹스러워졌다.

  그가 설령 류를 위해 경에 내어준 것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나선다 하더라도 제게 베푼 것들이 작아지거나 무가치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멋대로 쌓아올렸던 특권의식이 무너지자 지나칠 만큼 서운해 하고 있었다.

  류가 경만큼의 원조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필요한 만큼, 받을 수 있는 만큼 받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굳이 제 백성이 아니라도 류의 백성이 가엾고 안타까웠다. 왕을 잃은 백성이 얼마나 궁핍하고 가련한지는 미약하게나마 알고 있다. 저 역시 대국을 끼고 한 다리 건너 있는 나라였음에도 불구하고 구제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래서 현영궁에 들러 소식을 접하기도 하고 측근을 지밀하게 특사로 파견하여 류의 현 상황에 대해 꾸준히 확인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분이 류에 베푸는 것이 못내 섭섭한 것일까.

  요코는 멍하니 노대에 팔을 기대고 상체의 무게를 고스란히 기울였다. 그리고 하계에서부터 올라오는 희미한 빛 무리들을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하늘의 별빛과 만나 기이하게 반짝이는 장관을 이루었다. 그녀는 그것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노대에 올려두었던 등불로 인해 저 아래에 있는 바닷물에 떠오른 제 얼굴이 비칠 듯 말 듯 한들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한참동안이나 무심한 눈으로 계속 내려다보는 순간, 질척질척하게 낯선 감각이 가장 솔직한 심정을 비추었다. 요코는 그 순간 얼굴을 확 붉혔다. 그리고 스스로가 한심하고 혐오스러워졌다.

  그 분이 내가 아닌 다른 이에게 베푸는 선행이 싫다. 요코는 숨이 턱 막혔음에도 불구하고 그마저 막으려 입술을 틀어막았다. 자국의 국력이 어느 정도 타국에 베풀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면 차라리 안 대신 경이 류를 전면 지원하고 싶을 정도로 류를 향한 그의 손길이 서운하고 싫었다.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물밀 듯 수치심이 몰아쳐 전신을 휘감았다. 한 번 실마리가 풀린 기가 막힌 감정들은 그녀에게 여봐란듯이 낱낱이 헤쳐졌다. 그리고 부담스러울 만큼 그녀에게 저희들을 들이밀었다.

  명치끝에 돌이 얹힌 듯 무거운 갑갑증이며 목 끝까지 올라와 울렁거리던 불쾌감은 전부 제 추한 질투심에서 유래되었다. 연왕 쇼류는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구세주였고 그녀는 그가 저만의 영웅이기를 바랐다. 저만을 위한 영웅이기를 바랐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정말 그렇다고 멋대로 착각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안의 왕이라고, 안국 백성의 영웅이라 말하면서도 외부인이자 완벽한 타인일 제 이기적인 청을 늘 받아들여주는 것에 작은 도취감과 우월감을 느꼈다. 거절당할 것이라는 생각은 지금 생각해보건대 거의 없었다. 저도 모르게 그것이 당연하다 여겼다. 분에 넘친다며 감사해했지만 동시에 나라면 그분을 움직일 수 있다고, 당연히 그분은 도와주실 거라 생각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오직 나만을 위해 움직여주는 나를 위한, 나의 영웅.

  요코는 턱에 힘을 주었다. 그러지 않으면 바르르 떨릴 것만 같았다. 전신에 미약하게 들어가는 힘을 막을 수 없었다. 스스로가 이렇게나 한심하고 창피한 순간이 없었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감았다. 감은 눈 사이로 복잡한 눈물이 떨어졌다.

쇼류 시점으로 잇고 싶었지만 마감이 가까워서 끝냈습니다. 만 언제 이어 쓸지는 며느리도 모릅니다


6월이던가요? 
스터디 마감하면 올릴게요, 해놓고 그 글을 8월 중순에 긁어오는 패기! 그 패기 넘치는 자가 요기 있습니다!
물론 스터디는 지각하지 않았습니다. 마감 딱 7분 남겨놓고 제출했는데.. 그런데..
막상 블로그로 긁어오려니 글이 너무 너저분한 것 같아 수정할까, 수정할까 하다보니 이리 됐네요ㅜㅜ
여튼 영웅이라는 키워드로 쓴 쇼류 안 나오는 쇼류요코글이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쇼류<요코 짝사랑 자각글.
다음에 다시 돌아올 땐 어떤 글로 돌아올 수 있을지,,8ㅁ8.. 8월말 스터디 글만 아니기를 간절히 빕니다. 
그 전에 돌아오고 싶어요8ㅁ8.. 물론 마음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리고 혹시라도 여기 오실 십이국기러 분들ㅠㅠㅠㅠ 혹시 연경 떡밥 있는 곳이면 주저 않고 찔러주셔쓰면...
좋은 건 나눠먹는 거예여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답글은.. 오늘 안에 쓸게요! 방문객 분들 감사합니다ㅠㅠ 사랑해여!!!!! 외롭지 아나ㅠㅠㅠㅠㅠ

사족)
혹시 십이국기나 연경러 중 트위터 하시는 분 계신가요... 정말 요즘 또 타올라서 눈물나게 덕톡하고 싶어요...
아.. 거의 일상튓질이 대부분이지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네.. 일상튓 많이 부담스러우시져.. 
게다가 대화가 오가다 보면 좋든 싫든 저와 사귀어지게 된다는(?) 단점잌ㅋㅋㅋ 제가 좀 친해졌다 싶으면 개드립을 쳐여 자꾸..
그러니 보류. 지인계라 탐라 대화도 쩔고 나홀로 사생활 폭로도 쩔고.. 열폭도 쩔고.. 으 그만하게씁니다.

아 무슨 말을 하려고 사족을 굳이 달았는데.. 기억이 안나.............. 뭐지? 뭐더라....
그냥 그때쯤 되면 또 사족을 이어 달든 잡담글을 하나 더 파든 하겠습니다.



2013/10/05 - [이차창작문] - <십이국기>[쇼류요코]동옥 1-0, 1-1, 1-2

2013/10/14 - [이차창작문] - <십이국기>[쇼류요코]동옥 2-1, 2-2(+3-1?)

2013/12/05 - [이차창작문] - <십이국기>[쇼류요코]동옥 4-1, 4-2


와.... 마지막 업로드가 13년..... 근데 업로드하는 오늘은 14년 6월...





  요코는 쇼류가 내민 손을 붙잡고 겨우 기수에 올랐다. 두 기린이 어린 데다 질질 끌리는 기다란 치마를 입은 덕분에 올라타는 것부터도 큰일이었다. 마차를 이용할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애초에 하계로 내려가는 일이다. 금문을 벗어나려면 하늘을 나는 놈이라야만 했고 그러니 당연히 마차는 이용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의 손이 떠나기 무섭게 아이를 품에 숨길 듯 꼭 안고 포대기에 칭칭 둘러매었다. 그뿐만 아니라 다리에 힘을 주어 기수의 몸을 단단히 붙잡은 뒤 고삐를 두어 번 말아 감고 털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그야말로 만반의 준비였다. 이리 하지 않으면 분명 아이를 떨어뜨리거나 같이 떨어지거나 둘 중 하나는 겪을 것만 같았다. 아이를 떨어뜨리는 쪽이라면 사령도 있고 아이 자체도 전변하면 그뿐이니 사실 전혀 문제될 것은 없었지만 그 간단한 이치마저 잊을 정도로 꽤나 긴장하고 있었다. 덕분에 귀한 옷에조차 익숙지 않았던 몸은 몇 겹으로 둘러싼 부담의 하중에 치여 하계에 다다르기도 전에 비명을 지를 것 같은 상태에 이르렀다.


  오늘로 이틀째니 내일까지만 잘 버티면 이 황당한 행사도 끝이다. 이미 몇 번째인지도 모를 말을 되뇐 소녀는 비단 천으로 감싼 로쿠타가 불편하지 않게끔 팔을 꺼내어주고는 몇 번이고 확인했던 포대기를 다시 한 번 눈여겨보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도무지 안심이 되지 않아 끊임없이 눈을 굴려 티끌만한 불안요소라도 찾아내기 위해 애썼다.


  사실 제일 큰 불안요소는 바로 요코 자신이었다. 아이를 제대로 돌봐본 적도, 하다못해 안아본 적도 없는 자기 자신. 그런데 이런 갓난아이를 데리고 위험천만하게 하늘을 날아야 하다니 무섭고 꺼려지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이상했다. 차라리 케이키라면 조금 덜 걱정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타국 왕의 반신을 안고 있어야 한다는 부분은 굉장히 막중한 책임감으로 다가왔다.

  기린은 왕의 목숨과도 같았다. 이 어린아이에게 일어나는 사소한 일이 왕에게 다다를 때 어떠한 나비효과를 불러올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품에 안은 기린은 제 기린보다도 훨씬 어리니 제 손에 안위가 달렸음을 생각하자면 거의 두려워 질식할 정도였다. 정작 그 반신께서는 긴장감이라고는 전혀 없이 품에서 꼬물거리며 잘 놀고 계셨지만. 케이키였다면 분명 바짝 긴장한 주제에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을 터다. , 그런데 케이키는? 요코는 그제서 제 반신에 생각이 미쳐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시야에 들어온 케이키는 무언가를 찾으려는 듯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다. 갸웃거리듯 까딱까딱 무겁게 돌아가는 고개는 어린 아이가 가누기에 꽤나 어려워 보였다. 대체 무엇이 그리 보고 싶기에. 영 걱정이 되어 쳐다보는데 아니나 다를까. 저를 보고 환한 미소를 지으려던 얼굴이 중심을 잃고 뒤로 폭 넘어갔다. 아뿔싸. 케이키가 찾으려던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짤막한 다리까지 반짝 들리며 완전히 뒤로 기울어지는 모습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 기린이 다침으로서 제게 올 지도 모를 불투명한 안위에 대한 걱정은 조금도 그녀를 적시지 못했다. 저 높이에서 아이가 떨어지면 얼마나 다칠까.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경우의 수로 머릿속을 새하얗게 메웠다.


  “조심해야지.”


  낮은 목소리가 내리자 넘어가려는 아이가 말똥말똥 고개를 든 채 위를 올려다보았다. 연왕이었다. 쇼류가 안전하게 몸으로 아이를 받쳐준 것이다. 그는 아이를 안지도, 업지도 않았지만 바로 뒤에 앉아 한 팔로 안전하게 감쌌다. 요코는 뒤늦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있다는 것을 잠시 잊었다. 고작 아장아장 걸음마를 떼는 어린 아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안전하게 안지 않은 것은 아마 케이키의 고약한 자존심을 신경 써주었기 때문일 터다. 그놈의 고고한 자존심. 요코는 걱정 담긴 시선으로 얄밉게 제 기린을 노려보았다. 물론 연왕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나 하계에 닿을 때까지 어떤 변수가 있을지 알 수 없는 이상 자꾸 발목을 붙잡는 불안감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쇼류는 그런 경왕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걱정 없다는 양 자신 있게 남은 팔로 고삐를 휘어잡았다. 이미 제게 길들여진 기수를 끄는 것 정도는 다소의 변수가 있다 하나 한 팔로도 충분했다. 케이키는 불편한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신체의 안전에 대한 불안은 아닌 듯 보였다. 그저 주인과 함께 할 수 없는 상황 자체에 대한 갑갑증뿐인 모양이었다. 그 뿐이라면 차라리 다행이다. 두 사람은 케이키가 알았다면 굉장히 서운해 했을 지도 모를 생각을 가볍게 흘려 넘겼다.


  소녀는 그들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밝은 금발의 어린 아이는 표정은 부루퉁했지만 그래도 대놓고 내색하지는 않으며 그의 팔 안에 얌전히 담긴 채 앉아있었다. 귀여워라. 요코는 그리 생각하다 말고 흠칫 오한을 느꼈다. 금방이라도 쓰다듬어주고 싶은 모습의 케이키는, 그런 케이키를 보고 느끼는 제 감정은 가끔 지나치게 낯설었다. 평소에 저러면 얼마나 좋아. 그녀는 제 기린을 쳐다보다 문득 금빛 시선과 마주쳤다. 케이키를 품은 쇼류였다. 슬슬 내려갈까. 물음이 담긴 시선이었다. 요코는 손끝에 느껴지는 고삐를 더 세게 말아 쥐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기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바로 하늘로 뛰어들었다.




  요천 외곽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괜찮은 마구간이 딸린 여관을 잡아 기수를 쉬게 한 뒤 객실을 빌리는 일이었다. 객실은 물론 떨어져서 좋을 일이 없었기에 하나를 잡았다. 어차피 침실 둘에 거실 하나를 한 객실로 쳤으니 그녀로서는 그만하면 충분했다. 지금도 여전히 미행을 할 때면 서민의 씀씀이에 맞춰 움직이고는 하는 요코였다. 이들과 함께 나와 고급 여관에 숙박을 잡은 것 자체가 그녀로서는 이미 과분할 정도의 사치였다. 오죽하면 숙박료를 선불로 지급하는 순간 기수에서 내린지 꽤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멀미가 일었다.


  그들은 객실에 짐을 풀고 식사를 마친 뒤 시내로 나가기로 했다. 그 넓디넓은 궁이 지겨워 투정을 부리던 안국의 두 손님이 여관 안에서 얌전히 버텨주실 리는 없었다. 그렇다고 두 사람만 보내기에는 걱정도 되고 책임을 느끼는 바도 있으니 여관에서 편할 대로 쉬고 있을 수도 없었다. 더욱이 고급여관은 마음 놓고 편히 쉴 수조차 없도록 화려함으로 그녀를 압박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들을 따라나서는 것이 나름의 도피가 될 정도였다.


  요코는 여괴들에게 두 기린을 잠시 맡기고 쇼류와 함께 늦은 아침을 먹었다. 솔직히 물도 넘어가지 않는 상황 속이라 이미 궁에서 먹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여겼지만 안국 주종을 아이 하나 안은 채 따라다녀야 한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무조건 체력은 비축해두고 볼 일이었다.

  그 사이 두 기린은 금세 서로 어울려 놀기 시작했고 그들은 믿음직한 유모에게 반신을 맡겼음에도 품에서 떼어놓으니 어딘가 불안하여 시선을 아이들 쪽에 붙여놓은 채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식사를 마쳤다. 그나마 이런 때에는 믿을만할 것 같던 케이키 역시 아이가 된 이후 어딘가 엉뚱해지는 구석이 있어 괜히 불안했다. 게다가 방임주의를 표방하는 연왕마저 제 기린을 힐끗힐끗 살피는 모습을 보니 눈을 깜빡이는 찰나조차 불안했다. 그러던 차에 두 아이 중 작은 쪽이 이쪽을 돌아보고 바로 말을 걸었다.


  “요코, 요천에는 재미있는 거 없어?”

  “……. 글쎄.”


  요코는 말끝을 흐렸다. 오백여 년을 산 데다 십이국 곳곳을, 심지어는 봉래까지 심심찮게 왕래하는 기린의 흥미를 끌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게다가 곧잘 하계에 내려오는 편이라고는 해도 맘 편하게 놀러 나오는 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러니 로쿠타의 물음은 우습게도 이 나라의 주인인 요코에게 있어 허를 찌르는 난제였다.


  “요코보다는 오히려 네 자신이 더 잘 알 거라고 생각하는데?”


  쇼류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소녀를 대신해 로쿠타의 질문을 받아쳤다. 탁자 위로 턱을 괴고 피식 웃으며 쳐다보니 안락의자 위에서 다리를 쭉 뻗고 앉은 갓난아기는 어깨를 으쓱했다. 작은 어깨가 제 나름의 의사를 표현하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 요코는 희미하게 웃는 얼굴로 그 모습을 응시했다. 반면 케이키는 이미 무언가에 또 열중하기 시작한 것인지 그녀의 치맛자락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세계에 딱 열둘뿐인 아이들. 같은 나무에서 자라는 형제 같은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나 성격이 다르다. 하기는, 부모의 유전정보를 물려받아 한 태에서 태어나는 봉래의 형제들도 성격이 천차만별인 것을.

  그녀는 바람이 새는 듯한 웃음과 함께 작은 숨을 내쉬었다. 쇼류는 그런 소녀에게 잠시 시선을 주었지만 이내 거두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생각을 했던 모양이지만 딱히 물을 필요는 느끼지 못했다. 그는 안락의자 쪽으로 다가가 로쿠타를 안아들었다. 주인의 목을 끌어안기도 어려울 만큼 작고 짧은 팔은 그의 가슴팍을 꼭 붙잡은 채 동그란 자색 눈으로 제 주인을 올려다보았다.


  “어디든 나가면 그만이지. 어차피 여기서 버티고 있을 건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


  로쿠타가 공감했다. 요코는 씁쓸하게 웃으며 일어나 케이키를 포대기로 싸 업었다. 밥 먹기가 무섭게 나가자는 주종의 체력을 감히 따라잡을 수 있을까 벌써부터 불안하다. 케이키는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이 마음에 든 것인지 손가락에 감고 장난을 쳤다. 성수가 되기 전에는 어지간히도 제 세상에 곧잘 빠지는 엉뚱한 아이였던 것이 분명하다. 그녀는 일부러 머리카락을 늘어뜨려 기꺼이 아이의 장난감을 제공해주었다.

 



  “오늘 장은 안서나?”

  “아냐. . 장에나 데려가주라.”

  “대신 넌 사람 많은 데 가면 입 다물고 있어야 해. 알겠어?”

  “알겠다고. , 기린이라 귀찮은 게 한두 개가 아니라니까.”


  제멋대로 말이 통해버리니까. 로쿠타가 투덜거렸다. 그것에 쇼류 역시 지지 않고 바로 맞받아치며 핀잔을 주었다. 이 주종이 대화하는 것을 듣고 있자면 간혹 만담을 떠올리게 한다. 요코는 쓴 웃음을 지었다

  주종이 치고 박는 것을 보는 것은 우스웠지만 정작 스쳐간 내용을 가만 살피면 마냥 웃을 수만도 없었다. 대체 어떤 것에 놀라야 할지조차 막막할 정도였다. 오늘 장이 서는지 서지 않는지에 대해서조차 국주인 저나 영주후인 케이키가 아닌 제 재보에게 묻는 연왕에 놀라야 할는지, 당연하게 대답해주는 엔키에 놀라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 모든 복합적인 상황이 얽히고 얽혀 동시다발적으로 터지고 있는데도 의외로 담담한 제 자신에 놀라야 할 것인지. 그녀는 기운 빠진 웃음을 내다 말고 문득 생각에 미쳐 얼른 등 뒤를 향해 말을 붙였다.


  “케이키도 우리끼리 있을 때가 아니면 말하지 않는 거 알지?”

  “그렇지만 제 모습에서 말을 하지 않아도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겠습니까.”


  또랑또랑한 목소리와 어린 모습이 낳는 딱딱하기 그지없는 정중한 말투는 정말이지 처참할 만큼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생리적으로 느껴버리는 반발감이며 위화감은 일단 접어두기로 했다. 그 말이 담은 의미에 더 신경이 쓰였다. 요코는 헤아리듯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는. 확실히 이상하긴 할 터다. 케이키의 외양이라면 적어도 옹알이 이상은 뗐을 것 같아 보이니. 하지만 그가 말을 하고자 하는 의지를 싣는다면 그것은 분명한 발음과 뜻이 되어 전달될 것이 뻔했다. 로쿠타의 말마따나 제멋대로 말이 통해버리니.


  “그렇기야 하겠지만 말이나 의미가 분명히 통하는 게 더 이상할 테니까 어쩔 수 없잖아.”


  나지막한 한숨과 함께 답하자 케이키는 납득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행여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말을 않는 것에 대해 누군가 물어온다면 말문이 좀 늦게 터졌다거나 낯가림이 심해서 모르는 사람 앞에서는 입을 열지 않는다는 식으로 변명하면 그만이었다. 분명 전자 쪽은 케이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 테니 아마 후자 쪽이 될 가능성이 높다. 아니, 애초에 변명할 상황 자체가 오지 않기를 바랐다. 웬만하면 작든 크든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쇼류는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다 얼추 마무리된다 싶을 즈음 대로변 쪽을 향해 눈짓을 주었다. 이미 당장이라도 여관을 벗어나고 싶어 안달하는 눈이었다.


  “그럼 가볼까.”


  요코는 비장하리만치 무겁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것이 그녀를 극도로 예민하게 했다. 그런데 쇼류가 바로 웃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그렇게 긴장할 건 없고.”


  내색하지 않으려 했는데 티가 많이 났나보다. 무안해져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니 그는 똑같은 얼굴로 웃고 있는 로쿠타와 함께 성큼성큼 앞서 걷기 시작했다. 누가 반신 아니랄까봐 저렇게 똑같은 웃음. 그녀는 민망한 열기를 식히며 바로 그들을 따라 조심조심 발을 내딛었다


  늘어뜨리면 손톱마저 전부 덮어버리는 소매와 바닥에 끌릴 듯 말 듯 기다란 기장을 자랑하는 치마는 살갗 위에서 부드럽게 하늘거려 자그마한 움직임을 커다랗게 만들었고 커다란 움직임에서는 거친 느낌을 배제하여 입은 사람으로 하여금 마치 우아하게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하지만 아이를 안고 저자를 도는 데 있어 춤을 추는 듯한 우아한 동작이나 옷차림은 필요하지 않았다. 단단하고 안전하게 아이를 붙잡아 보호할 수 있는지, 사람 많고 번잡한 저자를 돌아다님에 있어 불편함이 없는지. 고려할 것은 딱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이 하늘하늘한 옷은 자칫 긴장을 풀었다가 케이키를 미끄러뜨려 놓치든 치맛자락을 밟고 그대로 함께 넘어지든 둘 중 하나는 반드시 겪게 할 것만 같았다. 아무리 좋게 생각해보려 해도 역시 불편한 차림이 편해질 수 있을 리는 없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남장을 할까 했지만 서민의 차림조차 아닌 귀한 옷으로는 남장이 쉽지 않을 것도 자명했다. 그녀는 애초에 따져 포기했던 사항을 다시 떠올리게 하고 마는 고약한 차림을 한숨과 함께 노려보고는 이미 저만치 멀어지려는 안국 주종을 잰 걸음으로 따라갔다.




  장이 벌어지는 거리로 들어서자 여관이 늘어서있던 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지나간다. 요코는 제 어깨에 매달려 호기심어린 눈으로 주변을 쳐다보는 케이키를 다독이고 슬슬 짜증을 내기 시작하는 엔키를 달래주었다. 강보 안으로 손까지 싸여있어 갑갑한데 말은 할 수 없으니 슬슬 짜증이 치받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제 반신의 표정을 살피기는커녕 지나다니는 미녀들이나 흥미로운 상품들에만 눈길을 주는 쇼류를 멈춰 세우고는 단풍잎처럼 자그마한 손을 빼내 조금이나마 덜 갑갑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러자 로쿠타는 정말이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그녀를 향해 있는 힘껏 팔을 뻗었다. 이렇게 무신경한 놈과 함께 있고 싶지 않아. 데려가줘

  요코는 난처한 표정으로 엔키를 쳐다보다 이내 쇼류로 시선을 옮겼다. 말하지 않아도 훤히 보이는 요구였다. 원래 기린은 제 주인과 떨어지기 싫어한다고 배웠다. 그 케이키조차도 제 옆에 붙어있고 싶은 티를 이렇게나 내버릴 정돈데 엔키는 왜 그렇지를 못할까. 아니, 쇼류가 화근인지도 모른다. 저리 두면 분명 언젠가 화가 날대로 난 엔키가 저자에서 빽 소리를 질러버릴지도 모른다. 상상하고 싶지 않은 상황에 한차례 전율한 요코는 결국 한숨하며 케이키에게 말했다.


  “케이키, 괜찮아?”


  그 말에 일부러 잠든 척 그녀의 어깨로 고개를 묻고 있던 케이키는 역시나 올 게 왔다는 듯 침울한 표정이 한가득인 얼굴을 들었다. 바로 뒤에 붙어있으니 요코로서는 그 얼굴을 살필 수 없었지만 쇼류에게는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안타까운 표정이 매우 잘 보였다

  하지만 그로서도 엔키보다 케이키를 데리고 있는 편이 더 나았다. 실은 그래서 뻔히 보이는 엔키의 요구를 모르는 척 무시했던 것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오백여년 얼굴을 부딪친 놈이다. 외양이 조금 바뀌었다고 그 성격 어디 갈까. 게다가 품에서 금방이라도 칭얼거릴 듯 꼬물거리는데 모른다면 그것이 더 이상했다.

  하지만 케이키는 목을 가누고 조금이나마 걸음마를 할 정도니 아주 갓난아이인 로쿠타보다는 데리고 있는 것이 편했고 몸집도 작은 소녀가 두 아이 중 큰 쪽을 업고 있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 많은 곳에서 행여 서로를 잃어버리기라도 한다면 이정표가 되어줄 아이들이 있어야 했다. 막바지인지 좀 시들시들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장은 장이라고 유동인구도 많았고 하루 종일 밖을 싸돌아다닐 텐데 저녁이면 장을 파하며 나누는 주연이나 축제 등으로 꽤나 소란스러울 것이니 이정표는 필수였다. 잃어버릴 때마다 다시 여관으로 돌아가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은가.


  나름대로 타당한 이유 중 몇 가지에나 수긍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요코는 허리를 굽혀 포대기 매듭을 풀었다. 그저 로쿠타가 딱하다는 측은지심과 최대한 문제될 소지를 배제하기 위해 비위를 맞춰주어야겠다는 생각일지도 모른다. , 그것도 상관없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쌍방 모두 합의하고 만족하면 될 일이다. 요코는 팔을 뒤로 뻗으며 조심스럽게 케이키를 품으로 끌어오려는 몸짓을 보였다. 그러자 쇼류는 포대기 째로 아이를 한 팔에 끌어안았다.


  “?”

  “보기 아슬아슬해서. 로쿠타나 받아주겠어?”

  “, !”


  요코는 다른 쪽 팔에 안긴 채 저를 향해 짧은 팔을 뻗는 엔키를 서둘러 받아 안았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가슴팍을 붙잡고 매달려 뺨을 비비는 행동은 얄밉지만 동시에 사랑스럽다. 이것도 연타이호의 계산된 행동일까. 자신이 아기에 약한 줄은 처음 알았다. 그것을 요 이틀 사이의 케이키와 엔키를 보며 새삼 몇 번이고 실감 중이었다. 소녀는 조심스럽게 엔키를 고쳐안았다

  쇼류는 제 품을 떠나는 것을 기뻐하는 것처럼 보이는 제 반신을 쓴 웃음으로 지켜보다 케이키를 두 팔로 들었다. 그리고 이 어중간하게 자그마한 아이를 업어야 하나 목마라도 태워야 하나 고민하다 결국은 팔로 넓적다리 뒤쪽을 안정감 있게 받치고 품으로 기울여 안았다. 등에 업기에는 자그마한 몸인 데다 어깨에 가려져 앞도 보이지 않을 테니 안는 것이 낫다 여겨졌다. 케이키로서도 시야가 트이는 이편이 나을 터다. 그는 아이의 어깨 위로 강보를 덮어 감싸주었다. 하지만 어린 아이는 실망한 표정으로 제 가슴에 매달려 있었다. 서운하다 이거지. 쇼류는 가만 아이를 내려다보다 문득 스치는 것이 있어 말을 건넸다.


  “뭐 갖고 싶은 거 없나? 오늘은 주머니가 꽤 두둑하니 뭐든 다 사주마.”


  주인과 떨어져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기에게 친한 척, 혹은 크게 인심 쓰듯 말을 건네자 그 자색 눈이 저를 향한다. 쇼류는 제 어깨를 붙잡고 있는 아이의 눈이 다시 착 가라앉아 잠길까봐 속으로 노심초사하며 애써 웃었다

  이 놈이고 저 놈이고 요코만 찾아서는 저도 곤란하다. 악몽 같은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은 걸 억지로 눌러앉은 마당인데 이 이상 그녀에게 더 폐를 끼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녀는 상황을 야기한 것이 자신의 관리 소홀이라고 여기며 책임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지만 연과 안의 국부가 찾아 달라 부탁하지만 않았어도 이런 골칫덩이 같은 일은 애초부터도 생기지 않았을 터다

  케이키는 그를 올려다보던 자색 눈으로 시장을 슥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한 상점을 가리켰다. 다행이다. 그는 속으로 크게 안도하며 아기의 등을 기분 좋게 쓸어주었다.


  “좋아. 가자고.”

  “,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 아니, …….”


  요코는 휘적휘적 걸음을 옮기는 뒷모습을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뒤쫓았다. 그러고 보니 어떻게 불러야 할지 호칭조차도 미리 정해두지 못했다. 그가 자신을 부르는 것처럼 이름을 부르면 될까. 쇼류는 저를 요코라 부른다. 그러니 이쪽도 마찬가지로 봉래의 이름을 부르면 될까. 생각해 보니 그는 잠행이나 방랑을 할 때가 많아 위명을 만들어 다닌다 했다. 가만. 도림원에서 처음 만났을 때 얼핏 들었던 것도 같다. 특이하지만 분명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는데. 그게 뭐였지.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이내 떠올렸다.


  “후우칸님!”


  공이라고도, 씨라고도 낮춰 부를 수 없는 분이다 보니 존칭이되 항간에서도 많이 쓰는 호칭이 자연스레 뒤로 따라붙는다. 그런데 쇼류의 반응은 의외였다. 놀란 눈으로 소녀를 돌아본 것이다. 마치 귀를 의심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혹시 기억이 잘못된 것이었을까. 그렇지 않으면 제가 부르는 위명이 내키지 않았던 걸까. 그는 눈을 마주친 채 잠시 우뚝 서있었다. 무슨 반응이라도 보여주었으면. 긍정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은 무반응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영 막막했다. 그러던 중, 쇼류는 당황한 기색이 흠뻑 묻었을 제 얼굴을 마주하고 금세 씩 웃었다.


  “저게 먹고 싶다는데?”


  그리고는 다시 휘적휘적 걸어 노점상에 다가간다. 요코는 그 자리에 멀뚱히 서 그가 가리켰던 곳을 반사적으로 쳐다보았다. 그곳에서는 아이들의 먹거리를 파는 것인지 다양한 색의 과자와 사탕이 침이 고이는 단내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요코는 아연하여 뒤늦게 쇼류에 따라붙었다. 방금 전 당혹스러운 채 반응을 살피던 것은 순식간에 기억 너머로 사라졌다. 쇼류가 한 말이며 가리킨 방향이 워낙 놀라웠던 탓이다. 그녀는 그의 등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케이키를 쳐다보았다. 케이키가? 이게 먹고 싶다고? 그녀는 믿기지 않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제 기린과 노점에 진열된 과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뭐가 먹고 싶은데?”


  쇼류는 또 다시 묻는다. 구체적으로 짚어보라는 의미다. 요코는 그것을 주의 깊게 살폈다. 정말 케이키가 먹고 싶다고 했을라고. 그런데 그의 어깨를 꼭 붙잡고 있던 고사리 같은 손가락이 이내 색이 고운 몇 가지 간식을 가리킨다. 소녀는 넋이 빠져 어안이 벙벙한 채 두 번은 보지 못할 광경을 쳐다보았다. 케이키가 지금 단 과자가 먹고 싶다고……. 쇼류는 눈짓으로 케이키가 가리켰던 것을 그대로 주문했고 상점의 주인은 능숙한 손길로 종이봉투에 담아주었다. 그리고는 주머니를 꺼내 셈을 하는 사내 대신 여인에게로 봉투를 넘겼다. 얼떨떨하게 그것을 떠안은 그녀가 여전히 얼빠진 채 서있는 동안에도 그는 주머니의 입을 벌려 동전을 꺼냈다.


  “계산은 제가!”


  제 기린이니 제가 계산해야지요. 그 의미를 담아 말려 세우지만 그는 막무가내로 상점 주인의 손에 동전을 쥐어주었다. 게다가 상인 또한 거리낌 없이 계산을 마쳐 거스름돈을 건네주며 말했다.


  “이 주머니나 저 주머니나 어차피 한 주머니인데 뭘 그리 정색을 하고 그럽니까.”

  “한 주머니라니요. 물론 나중에 셈을 쳐드리면 된다지만 그래도 경우가 아닌걸요. ……, 아이가 떼를 쓴 건데.”


  기린이라고 할 뻔했다. 요코는 가까스로 제 입을 틀어막고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쇼류는 어차피 푼돈인걸, 하고 어깨를 으쓱했고 요코는 미안한 마음에 하지만, 하고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 때 상인이 별 시답잖은 이상한 소리를 들어본다는 듯 웃으며 다시 끼어들었다.


  “어차피 한 사람이 빌어 나온 자식들도 아닐 텐데 애들 놓고 네 편 내 편 해가며 편가를 일 있어요?”

  “……?”


  소녀는 멍청한 표정으로 상인을 쳐다보았다. 남자가 하는 말은 쉬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물론 소리는 알아들었지만 그 의미가 너무나도 기상천외해 도저히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그런데 함께 얼빠진 채 굳어있던 쇼류의 표정이 일순 무너진다 싶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들었지? 애들 놓고 편 가르지 말라잖아.”

  “, 잠깐만요. 저기, 후우칸님!”

  “변명할 셈이야?”


  말려들고 있다. 말려들고 있어. 요코는 어이가 없어 당황한 채 입을 막 열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금발에 자안이라니 기린이 가지는 색 아닙니까?”


  그게 논점이 아니잖아요, 하고 곁에 선 사내에게 항변하려던 소녀는 조개처럼 입을 싹 다물었다. 두 사람을 쳐다보던 상점 주인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든 것이었다. 역시나 한 번은 이런 질문이 돌아오는구나. 어쩌면 염두에 둔 채 긴장이 덜 풀렸을 때 물어와 다행이었다. 그녀는 웃는 얼굴로 재빨리 얼버무렸다.


  “눈은 타고난 거지만 머리는 귀하게 자랐으면 하는 마음에서 두 아이 모두 금색으로 염색을 한 거예요.”


  예쁘지 않나요, 하고 재빨리 되물으며 쐐기를 박는다. 그리고 뒤늦게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 상인과 연왕의 발언을 제 입으로 확정지어 놓았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지는 않겠지만 이미 의혹이 깊어진 와중에 무슨 말을 어찌 한단 말인가. 첨언할수록 스스로 수렁에 빠질 뿐이다. 요코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어쩌면 나이 차이가 많아 보이지 않는 남자와 여자, 그리고 각자 안고 있는 갓난쟁이 둘이라는 조합은 가족으로 보이기에 지나칠 만큼 충분했다. 다른 관계를 상상하는 것이 더 어려울 정도로. 그런데……. 그 순간 상인이 말끝을 흐리며 이상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금색은 상서로운 색인데 염색이 가능했던가?”


  다 들릴 정도로 중얼거리는 상인에게 이번에는 쇼류가 받아쳤다.


  “나름 타이호와 면식이 있어서. 허락도 구하지 않고 이런 색으로 물들일 수 있을 리 만무하지.”


  애초에도 이 세계에서 금색은 염색으로 절대 나올 수 없는 색이다. 그것이 운해를 거치고 세월을 거쳐 하계 사람들에게는 신성한 황색으로의 염색을 엄격히 금한다는 암암리의 율법으로 바뀌어 있었다

  뭐 굳이 알 필요 없는 사실이니, 하며 구렁이 담 넘어가듯 슬쩍 받아친 쇼류는 웃는 얼굴로 말을 마쳤다. 그러자 상인은 놀랍다는 듯 턱을 벌린 채 손님들을 쳐다보았다. 이 부부는 타이호와 면식이 있는 귀한 신분들이었다. 물론 입고 있는 옷이나 장신구가 그럴듯해 평범한 사람들은 아니라 생각했건만. 단순한 부자나 세도가 또한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많이 팔라며 상투적인 인사를 남기고 물러나는 가족을 향해 말을 건넸다.


  “찾아주셔서 영광이었습니다. 부디 백년해로하십시오!”


  요코는 그 말에 얻어맞은 듯 주춤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결국 오해는 조금도 풀지 못했다. 금발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화두로 오르내릴까봐 급히 자리를 벗어난다는 것이 그만. 아니 물론 다시 볼 사람도 아니기는 한데. 그녀는 열로 화끈거리는 얼굴을 푹 꺾었다. 하지만 염문의 또 다른 주인공인 쇼류는 다만 어깨를 으쓱이고는 그녀의 품 안에 담긴 제 반신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미 백년해로는 질릴 정도로 연달아 해봤는데 말이야. 한 다섯 번쯤?”


  그러자 로쿠타가 배냇짓을 하듯 작게 낄낄대며 웃었다. 그는 이번에는 케이키를 향해 말했다.


  “그렇다고 너도 딱 백년만 해로하라는 건 아니야. 적어도 내가 질려서 때려치우기 전까지는 쭉 네 주인과 해로해줘.”


  그 말에 보통이라면 질린다는 듯 한심한 표정을 지었을 케이키가 명랑한 웃음소리를 내며 함께 따라 웃는다. 그저 주인과 오래 함께 해달라는 의미만이 기껍게 들린 모양이었다. 요코는 괜히 연왕과 저 사이를 떠올리고 말았던 것에 내심 무안해져 쓰게 웃었다

  분명 상인이 의도한 것은 연왕이 반응한 것과는 달랐을 터다. 아마 제가 떠올렸던 것이 맞겠지. 그럼에도 그는 민망해할 소녀를 달래기 위해 바로 화살을 돌려놓은 것이다. 그 마음 씀씀이까지 닿을 듯 말 듯 헤아려지니 더 민망하고 더 감사하고.


  요코는 쇼류를 곁눈질로 슬쩍 올려다보고는 부끄러운 웃음을 몰래 삼켰다. 그리고는 민망함을 무마하기 위해 어렵게 봉투를 벌려 과자를 꺼냈다. 하지만 그것은 어느 하나 어린 아기가 먹기에 크지 않은 것이 없었다. 로쿠타는커녕 케이키라도 그것을 입에 넣고 먹는 것은 무리였다. 어쩔 수 없나

  그녀는 사탕을 제 입으로 가져가 잇새로 잘게 깨부쉈다. 그리고 부서진 가장 작은 조각 두 개를 추려 하나를 케이키의 입에, 다른 하나를 로쿠타의 입에 넣어주었다. 삼키지 말고 빨아먹는 거야, 알지? 묻는 말에 두 기린은 고개를 끄덕이고 이내 우물거렸다. 요코 역시 입 안에 놓인 커다란 사탕조각을 우물거렸다. 달고 향긋한 맛이 입안으로 확 퍼지니 가라앉았는지도 몰랐던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쇼류를 향해 봉투를 권했다.


  “후우칸님은 드시지 않으세요?”

  “아니, 단 건 별로 즐기지 않아서.”


  그는 웃는 얼굴로 딱 잘라 거절했다. 그리고는 신경 쓰지 않는 척 곁눈질로 슬그머니 내려다보았다


  사실 제가 봉래에 있던 때라면 그리 이상할 것은 없는 모습이다. 열여섯 먹은 여자는 소녀가 아니었다. 언제 혼인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처녀였다. 그에게 있어 열여섯은 어린 어머니일 수는 있어도 어린 소녀는 아니었다. 그러니 요코가 아이들을 먼저 챙기는 모습은 거의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상인이 품었던 부부라는 의혹에 대해서도 의심 일편 없이 그럴 수도 있겠군, 하며 바로 흘려 넘겼다. 뒤에 가서야 가만, 어째서?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다만 그 소저가 요코라는 점은 어딘가 재미있고 우스웠다. 원래부터도 배려가 많은 성격인 것은 알고 있었으나 오해를 받은 직후라 그런 것인지 품 안의 갓난아기와 자신에게 안긴 돌쟁이를 서툴지만 살뜰히 챙기는 그녀는 두 아이의 모친으로 보였다


  쇼류는 가볍게 웃었다지금까지 꽤 다양한 신분을 위장해 방랑을 다니며 놀았다 여겼는데 생각해보니 아비가 되어보는 것은 처음이다. 그는 저희들이 의외로 구색 맞는 그림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입술 위로 호선을 그었다. 일탈하듯 잠시 새로운 역할에 몰입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일단 끗




와, 이게 대체 얼마만의 동옥이죠?

한 세달 쯤 됐을까 했는데 링크 끌어오다 보니 반년을 거뜬히 넘기네요.. 2013년 12월이라니.. 대단하다 나8ㅁ8

그럼에도 불구하고 퀄릿에는.. 네.. 없어요.. 변화가 없어요. 아니짘ㅋㅋ 하강곡선은 열심히 그리고 있습니다.


이번달에는 월터디가 있기 때문에 아마 지각하지 않는다면(더 이상의 지각은 앙대...ㅠㅠ) 

월말 안으로 여기도 단편을 올릴 수 있을 거예요. 이번달 주제는 영웅..인데... 음. 아주 흔한 스토리가 될 거라 생각합니다ㅜㅜ

아랑은 한 글자도 안 썼고 리메도 진척이 없네요.. 열심히 덕질하고 싶지만 소비가 전혀 없으니 연성이 나아가질 못해요ㅠㅠ


2013/11/16 - [이차창작문] - <십이국기>[쇼류요코]아랑 -1-

2014/01/22 - [이차창작문] - <십이국기>[쇼류요코]아랑 -2

2014/03/17 - [이차창작문] - <십이국기>[쇼류요코]아랑 -3-

2014/03/28 - [이차창작문] - <십이국기>[쇼류요코]아랑 -4-





  요코는 길량의 등에 올라타고는 어색하게 주변을 돌아보았다. 현영궁에서 머문 시간은 고작 이틀 정도에 불과했지만 그 사이 마음에 걸리는 일들이 쉴 틈 없이 벌어졌다. 아니, 이렇게 말하는 것은 맞지 않다. 눈으로 드러나 보이는 일들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기분이 조금. 

  그녀는 멀찌감치 떨어져 다닥다닥 붙어 묘한 눈을 하고 있는 연의 측근 삼인방을 쳐다보았다. 눈을 마주치면 내내 죄지은 것처럼 찔끔하며 게 눈 감추듯 시선을 물리고, 그렇게 아주 피하는가 싶으면 또 뭔가 말하고 싶은 것처럼 쭈뼛쭈뼛 뻐끔뻐끔. 그러니 괜히 이쪽 마음도 어색하고 켕길 수밖에. 그런데 이번에도 굳이 배웅까지 나와서는 저런 눈을 하고 있다니. 그들의 주인을 불러와달라며 제게 요란한 심부름을 시킨 것이 아직도 마음에 걸리는 것일까.


  “도착하면 란을 띄우는 것 잊지 말고.”


  다른 생각으로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었다는 것을 눈치 채기라도 했다는 양 그들의 주인이 그녀에게 말을 건다. 꼼꼼한 손길로 고삐가 단단히 채워졌는지 확인해 그녀의 손에 쥐어주고는 눈을 마주한다. 그는 키가 큰 편이라 길량의 등에 올라앉아도 그와의 눈높이는 그다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요코는 쇼류를 마주보고는 이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외교에 대한 것을 핑계로 놀러왔다 돌아가는 것뿐인데도 그는 굳이 기어코 시간을 내 저를 직접 배웅해주고 있었다. 그러니 그 마음이 고마워 웃음이 날밖에.


  “제가 설마 중간에 딴 길로 샐까 걱정하시는 건가요?”

  “당신이 워낙 나를 좋아하니 내 그런 점마저 닮았을까 걱정이 되어놔서.”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양 어깨를 으쓱하고는 우쭐하게 말한다. 그 모양새가 황당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고 싶었지만. 요코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먼저 튀어나와버려 이상한 표정이 되어버린 얼굴을 뒤늦게 수습했다. 그나마 약간 삐친 듯한 표정을 지어보이지만 이미 때는 늦어도 한참 늦은 뒤였다. 그녀는 결국 웃음기를 머금은 채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랑께서는 훨씬 더 저를 아껴주시지만 절대 저를 닮지는 않으시잖아요?”

  “없이 살아온 세월이 적지 않으니 굳어버린 거야. 그건 어쩔 수 없어.”


  정말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모습에 그녀 역시 과장스럽게 얄밉다는 표정을 지었다. 과연. 그렇게 나오시다니, 할 말이 없다.


  “아니면, 시간을 들여 어디 한 번 바꿔보던가.”

  “되었습니다. 아랑께서 성실해지시면 관들이 오히려 불안해하겠지요.”

  “글쎄. 지금도 이미 충분히 불안해하고 있을 텐데.”


  말과 함께 쇼류의 얼굴로 예의 그 성격 나쁜 웃음이 드러난다. 그리고 시선이 곁눈질하여 향하는 곳은 바로 측근 쪽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들은 또 그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쭈뼛쭈뼛 뻐끔뻐끔. 피하고는 싶지만 무언가 말하고는 싶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묘한 표정이며 몸짓들. 정말 연왕의 말대로 그것은 불안의 징후를 닮아 있었다. 왜 저리도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보이는 건지 도통 알 수 없지만. 


  요코는 정말 이제는 떠나야 할 시간임을 느꼈다. 일각이 소중한 사람이다. 그녀나, 그나, 그의 측근들이나. 어차피 머잖아 다시 만날 터인데 작별 인사가 이렇게나 길어지는 것은 그리 좋지 않았다. 꼭 다시 못 만날 사람처럼 여운을 남기는 것은 싫었다. 곧 다시 뵙게 될 테니까. 그녀는 쇼류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만 가볼게요.”

  “정말 혼자서 괜찮겠어?”

  “올 때도 이렇게 왔는걸요. 제 몸 하나 정도는 지킬 수 있고, 더욱이 운해 위로 가는 거니 걱정 없지요.”


  당사자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어쩔 수 없다 생각한 것인지 고개를 끄덕인다. 요코는 정말 걱정할 필요 없다는 듯 밝은 얼굴로 그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러자 쇼류 역시 고개를 숙일 듯 깊이 끄덕이고는 두어 걸음 물러났다. 길량은 떠날 적기임을 안 듯 등에 태운 주인의 지시조차 없이 바로 창공으로 뛰어올랐고 그는 오랫동안 그녀가 작아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언제나 그렇듯 팔짱을 낀 채 께느른하게 의자 위로 늘어졌다. 푹신한 솜을 안감으로 대고 최상급 비단으로 덮어 그 틀을 화려하게 세공한 의자는 귀부인이나 귀공자가 우아하게 앉아있는 모습을 저절로 연상케 했지만 상상과 현실의 괴리를 최대한 충격적인 방식으로 증명이라도 하겠다는 듯 그는 거의 녹아내릴 듯 엉덩이를 쭉 빼고 늘어져 있는 한량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투박하게 대충 차려입었지만 어느 정도 격식이 묻은 의대를 보아하면 그래도 아무렇게나 굴러먹던 양반은 아닌 성 싶건만. 

  아니, 그의 옷은 자세히 보아하니 비단이 보통 상품이 아니었다. 검박한 색상을 쓰기는 하였으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빛에 비춘 각도에 따라 매끄럽게 문양이 드러나고 숨었는데 여간내기의 솜씨가 아니었다. 본인이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지만. 

  이리 되면 결론은 하나다. 훌륭한 가구들로 들이 채워진 당실 내에 어울리지도 않게 한량 같이 되먹지 못한 자세로 축 늘어져있는 사내는 최소한 이 전각의 주인일 터다. 때마침 하관이 들어오다 그를 마주하고는 얼른 엎드려 평복했다.


  “주상을 뵈옵니다.”

  “됐어, 됐으니까 난 신경 쓰지 말고 하려던 일이나 해.”


  나라의 지존이라 불린 사내는 귀찮다는 듯 손목을 몇 번 까딱여 예를 물리고는 다시 창밖을 느른하게 쳐다보았다. 그러자 몸가짐에 신중을 거듭해 일어나는 하관의 눈에 설핏 불만이 어렸다. 신경 쓰지 말라고는 말씀하셨으나 어찌 제 주인이자 궁궐, 나아가 나라의 주인이 되는 분을 두고 안 보이는 양 할 일을 하고 나간단 말인가. 게다가 저들이 하려는 것은 청소인데, 청소할 때 사람이 있으면 얼마나 귀찮은지 왕께서는 아시기나 할는지. 

  하관은 한숨하며 제 뒤를 따랐던 해들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어찌되었든 저리 윤음을 내리셨으니 신경 쓰지 말고 너희들 본분에나 충실하도록, 하는 의미다. 해들은 하관과 다를 바 없이 한숨을 녹인 얼굴을 하고 입을 삐죽거렸지만 이내 능숙하게 표정을 갈무리하고는 저마다 가지고 왔던 도구들을 집어 들었다.


  그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무료할 정도로 안온한 날이 쭉 이어지는 창밖은 마치 그림 같기만 하다. 운해 위가 생소한 이들이야 그 말에 웃는 얼굴로 감동하며 고개를 주억거리겠지만 어느 정도 살아본 이들은 권태로운 표정으로 통감하듯 설레설레 내젓는다. 그리고 쇼류는 불문가지, 바로 후자 쪽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남들보다 두 배는 가만히 못 있는 그 성정 치고 요 며칠을 얌전한 것을 보면 궁내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싶을 정도였지만 현영궁은 별 일 없이 평안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아니, 평안하다 보기에는 조금 미적지근한 뒷소문이 티 나지 않을 만큼 얕게 부글거리고 있었다. 바로 그 평안함 때문이었다. 

  왕이 옥좌를 지키고 있음으로 인한 평안함은 한편으로는 저치가 웬일인가, 하는 불안감을 동반했다. 분명 빈객을 배웅한 뒤 바로 하산할 거라 생각했건만. 그는 지루한 표정이며 권태로운 손짓을 하면서도 얌전히 노침을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놀랍게도 사흘쯤에 이를 무렵이던가. 지루함에 슬슬 균열이 생길 위기에 이르렀을 때쯤, 그는 드디어 웃는 얼굴을 하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처음에는 작은 점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조금씩 커지며 특이한 형상이며 색을 보였다. 티 하나 없이 말간 하늘에 일어난 자그마한 균열은 가로로 얕게 찢어져 구물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가까워질수록 힘을 얻어 푸드덕거렸다. 새였다. 허나 사가에서는 물론이거니와 구름의 바다 위에서조차 보기 어려운 종류였다. 저것은 요수도 요마도 아니었다. 

  유려하게 날갯짓을 하며 다가오는 그것은 정확히 사내의 앞으로 곧바로 날아들었다. 그는 웃음기 밴 얼굴로 팔을 뻗어 새에게 제 손을 내어주었다. 

  일국의 왕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새. 그것은 주인인 왕이 어디에 있든, 주인이 원하는 이가 어디에 있든 반드시 윤음을 전하고 목소리를 받아오는 영특한 새였다. 이 궁에도 그를 위한 새가 한 마리 있었고 그것은 이 녀석과 쏙 빼닮았다. 꽁지깃을 제하자면. 쇼류는 꽁지깃이 푸른 란의 유순한 머리 위로 가볍게 손가락을 세워 쓰다듬었다.


  “어……. 으음. 아직도 새를 마주하고 홀로 독백을 하려면 자꾸 부끄러워지는 바람에 서신이 늦었습니다.”


  쇼류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내고 말았다. 이곳에서 유학중인 반수 친우에게도 꼬박꼬박 란으로 연락을 주고 있다 들었건만 그녀는 아직도 이것이 부끄러운 것이다. 대체 어떤 것이 그녀를 민망하게 만드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오히려 알 수 없어 황당한 면이 귀염성 있어 웃음을 자아내었다. 이제 그녀도 겉보기 나이에서는 어느 정도 벗어났다. 그런데도 아직도 이런 아이 같이 순수한 구석이 있었다.


  “염려해주신 덕분에 만 하루도 채 걸리지 않아 금파궁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바로 띄웠다 해도 연왕께서 바로 확인해주실 지는 잘 모르겠어요. 란이 찾아가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란이 운해 아래를 돌아다니는 것을 분명 저어하실 테니까요.”


  새가 전하는 웃음기 섞인 소녀의 목소리에 그는 쓴 웃음을 내었다. 자신이 당연히 이미 하계에 내려갔을 것이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틀린 것은 아니다. 란이 올 것이라는 생각만 아니었어도 당장 내려갔을 테니. 허나 완전히 맞는 말 또한 아니었다. 평소라면 란이 오든 말든, 하고 내려갔을 것이었다. 현영궁으로 먼저 올라가라 쫓아내면 그만일 테니. 허나 그리 하지 않았던 것은 이번에 당도할 란의 목소리는 꽤나 기대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 약간 실망하는 중이었다.


  “아, 혹시 저 지금 또 연왕이라 불렀던가요? 죄송해요.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웃음기가 지워지고 당황하는 목소리. 담담하게 부리를 여는 란의 모습과는 다소 대조적이었다. 쇼류는 저가 생각했던 부분에 대해 바로 언급하는 란을 조금 놀란 눈으로 또렷이 쳐다보았다. 새는 그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고 바로 말을 이어 전했다.


  “앞으로도 자주 실수할 거라 생각하지만 그간 익숙했던 것이 한 순간 쉽게 고쳐지지는 않을 테니 그때까지는 이해 부탁드려요.”


  조심조심 상냥하게 양해를 구하는 가느다란 목소리. 그리고는 커다란 심호흡 한 번. 쇼류는 호흡마저 전하는 새의 부리에 집중했다.


  “아랑.”


  그리고는 가슴 어딘가가 선뜩하게 한 번 철렁. 쇼류는 멍청하게 굳은 채 눈을 깜빡였다. 다정함이며 수줍음이 함빡 묻은 호칭은 새삼 낯설었다.


  “혹시나 싶어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슈코우 씨들은 잘못이 없어요. 있다 하더라도 제가 공범이에요. 더욱이 아랑께서도 원인을 제공하셨던 거니까 그들을 엄히 책하실 수는 없습니다.”


  당신의 잦은 출궁이 도를 넘었기 때문에 타국 왕인 제게마저 도움을 청한 게 아니겠어요. 그리 묻고 압박하는 솜씨가 일품이다. 더욱이 그 호칭과 함께 찌르니 더욱 할 말이 없다. 그는 헛웃음을 내었다. 어차피 문책할 생각은 없었다. 요코는 모르는 듯했으나 그들은 더한 무례도 곧잘 저지르고는 했다. 저부터도 그를 그다지 자신에 대한 불경이라 여기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있으니 괜히 더 그들을 쪼아대며 장난친 것뿐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이 진심이라 생각해 영 마음이 쓰였던 모양이었다.


  “더욱이, 그분들 덕분에 제가 연왕께 가까워졌으니 도리어 고마워해야할 노릇인지도 모르죠. 그렇죠, 아랑?”


  쇼류는 난처한 얼굴로 제 입가를 받치듯 느슨하게 가렸다. 순하고 착한 소녀에게 못할 짓을 저지른 것이 아닌가, 싶은 의문이 지금서야 스멀스멀 심장을 타고 뜨끔뜨끔 퍼져나갔다. 난감하게 되었다. 나중에 농이었다 말한다 하더라도 그녀가 지을 표정이며 반응이 눈에 선했다. 당황해 얼굴을 확 붉히고는 당분간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으려 할지 모른다. 그건 곤란한데. 

  그는 저나 슈코우의 말을 철썩 같이 의심 한 번 없이 믿는 그녀의 맑은 목소리에 뭐라 대꾸를 해야 할지 몰라 입을 꾹 눌렀다. 금파궁으로 떠나기 전 바로 말을 해주었어야 했다. 양심이 꽤나 찔린다. 맥동하는 심장이 흥분해 가슴을 세게 두드리며 당혹스러운 감정을 찌릿하게 혈류에 맞춰 흘려보내니 온몸이 슬그머니 뜨끔거릴 정도였다. 

  다음에 언제 올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에게 말해주어야 했다. 아니, 란에 대한 답장으로라도 말해주어야 할까. 대면하고 잘못을 청해야 옳음이 아닌가. 허나 그녀가 언제 다시 올까. 저도 현재로서는 금파궁행이 당분간 어려운 형국인데. 쇼류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 머지않아 다시 찾아뵐 수 있을 듯해요. 저번에 말씀하셨던 건에 대해 늦어도 내달 내로 조정 의견이 정리될 듯합니다. 아랑께서는 당분간 출궁이 어려우실듯하고 금파궁이 이대로 큰 문제만 없다면 아직 성문화된 조약도 아니라 정식으로 관을 움직이는 것 또한 어려우니 제가 찾아뵐 생각인데……. 혹여 곤란하시다면 그 이전에 말씀해주세요.”


  그녀는 조잘조잘 숨도 쉬지 않고 제 의견을 얘기하다 의향을 묻듯 잠시 망설였다. 내달 내라. 이달은 얼마 남지 않았다. 

  쇼류는 잠시 망설였다. 그 사이 눈치라도 챌까. 둘만 있을 때나 부르자 약조한 것은 아니나 사적인 호칭임은 알고 있으니 관들 앞에서 그리 부를 일은 없을 테고. 그래, 설마 그 안에 문제가 생길까. 그는 납득하듯 고개를 얕게 끄덕였다. 

  그나저나 참 우습다. 그는 몇 마디 더 조잘대다 부리를 다무는 란에게 은가루를 먹이며 생각했다. 분명 껄끄러운 호칭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싫지가 않다. 리코우의 말마따나 태과의 인연 덕분에 기존의 지인이며 측근들에 비해 더욱 가깝게 여기는 탓일까. 제가 원인을 제공하고 부채질을 한 데다 그녀는 뜻도 모르고 쓰는 것임을 알아서일까. 그보다는 무언가 더 구체적인 원인이 있을 법도 한데. 쇼류는 잠시 망설이다 까짓 거 어떠랴, 하고 웃음을 내었다. 어차피 내달이면 이 장난도 끝이다. 그는 새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로부터 약 한달 뒤. 쇼류의 생각은 일면 그럴듯해보였으나 정작 보기 좋게 빗나갔다. 두 사람 사이 주고받는 란이 화근이 된 것이다.


  요코는 집무실에 오기가 무섭게 저를 기다리고 있던 손님을 만났다. 횃대에 얌전히 앉아 한쪽 날개를 펼치고 우아하게 깃털을 정돈하는 란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생각보다 늦게 와서 불안하던 참이었다. 슬슬 현영궁을 방문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해야 할 터인데 새가 돌아오지를 않으니 난처할 따름이었다. 뿐만 아니라 제가 이달에 찾아뵙고자 한다며 말씀드렸던 것을 잊고 또 멀리 떠도시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마저 들었다. 

  다행이도 그렇지는 않은가보다. 그녀는 반가운 마음에 손을 뻗었다. 새는 그리운 제 주인에게로 안기듯 얼른 그녀의 팔로 옮겨 앉았다. 얼른 소임을 마치고 싶은 모양이었다. 요코는 난처하게 웃으며 새의 머리를 가볍게 손가락 끝으로 쓰다듬었다. 시일이 촉박하니 바로 또 날려 보내야 할 터인데. 

  새는 이미 충분한 은가루를 먹은 것인지 목을 낮게 울리고는 부리를 열었다. 그리고 그 틈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여리고 미려한 생김새와는 다르게 진중하게 낮고 또한 그것을 상쇄시킬 만큼 밝고 명랑한 남자의 것이었다.


  “예정에 없던 출타중이다 보니 답신이 늦었어. 운해 위에서 띄웠나? 란이 하계로 내려오지를 못해 관궁산에서 꽤나 헤맨 모양이야. 미안하군. 충분히 쉬게 한 뒤 보낼 수밖에 없었어.”


  그랬구나. 요코는 납득했다. 주성이나 궁성을 통하지 않으면 운해에서 하계로 내려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운해가 가로막고 있는 탓이다. 하필 그때 하계에 계셨을 게 뭐람. 소녀는 딱한 마음에 제 란을 부드럽게 보듬어주었다. 그의 말대로 충분히 잘 쉬고 온 것인지 오랜 여독은 남지 않은 눈을 한 새는 계속 부리를 열어 목소리를 전했다.


  “설마 왜 이런 때 하산해 있었냐고 바가지를 긁지는 않겠지? 신료들의 잔소리에도 그럭저럭 이골이 난 몸이지만 당신에게마저 듣고 싶지는 않아.”


  란이 전하는 서신을 들을 때 가장 재미있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일 터다. 새는 초롱초롱 빛나는 눈으로 저를 똑바로 쳐다보고 담담하게 목소리를 전하는데 그 목소리에는 새의 표정과 극명하게 갈릴 정도의 감정이 실려 있다. 아마 다른 왕들도 분명 우스울 거야. 정말 장담할 수 있어. 요코는 떨떠름해져 저어하는 기색이 담긴 목소리에 키득키득 숨죽여 웃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이전에는 한참 연하인 그녀에게 간혹 너라는 하대를 섞어 쓰기도 했었지만 그녀의 호칭이 바뀐 뒤부터는 꼬박꼬박 당신이라 존중해 부르고는 했다. 저보고는 가까워지라며 채근하더니 정작 그는 멀어진 셈이다. 저를 존중하기 위함이라 하였으나 과연 그뿐일는지. 이번에 뵐 때 꼭 여쭤보고야 말리라. 그렇지 않아도 다짐해놓은 참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달도 슬슬 끝나가려는 참인데. 당신, 오지 않을 셈인가?”


  그렇지 않아도 그것 때문에 이제나 저제나 하며 답신을 목 빠져라 기다렸다는 걸 아실는지. 요코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작게 한숨을 녹였다. 그의 잘못만은 아니니 무어라 탓할 수는 없지만 재촉하는 듯 여겨지는 그의 말에 억울한 반응을 보일 수는 있을 터다. 그녀는 얄밉다는 듯 그에게 전해질 리 없는 대꾸를 중얼거렸다.


  “그야 아랑께서 이 아이를 내내 붙잡고 계셨으니 그렇지요.”


  그때, 기척조차 내지 않고 다가오는 인영이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말을 듣고 우뚝 멈춰 섰다가 조금 더 잰 걸음으로 후다닥 다가왔다. 귀족 가문의 영양이라 하여도 쉬이 납득하리만치 귀한 태를 타고난 아름다운 소녀였다. 그런데 그녀는 낯빛이 제 머리색만큼이나 푸르스름해져 놀란 기색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제 주인 되는 왕에게 감히 예를 올리는 것조차 잊고 어깨를 얼른 붙잡아 돌렸다.


  “아랑이라니?”


  그것에 놀란 표정을 하고 몸이 돌려진 소녀가 어안이 벙벙한 듯 멍청하게 굳어있다 얼굴을 발그스름하게 물들였다. 누군가가 듣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그녀는 민망함에 슬쩍 몸을 다시 돌리며 란을 횃대로 옮겨놓았다. 새는 작게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내 부리로 다시 날개를 가다듬으며 치장에 열중했다. 요코는 그것을 빤히 쳐다보며 변명하듯 등 뒤의 소녀에게 말했다.


  “연왕 말이야.”

  “…연왕?”


  잠시 뜸을 들이다 뱉는 말은 굉장히 짧았다. 그래서 그 말에 모든 의미가 복합적으로 구겨져 들어가 있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나 쓰는 거야? 연왕을 왜 아랑이라 부르는 거야? 언제부터 그리 부르는 거야? 일단 지금으로서는 읽을 수 있는 것이 딱 이 정도뿐인 듯하지만. 쇼우케이, 진정해. 요코는 여사를 향해 가볍게 가라앉히라는 손짓을 해보였다. 간신히 입은 다물었지만 그녀는 이번에는 뚫어져라 요코를 노려보았다. 요코는 말하는 제 모습이 간만에 어색하다 느껴보며 어설픈 웃음과 함께 답했다.


  “그분이랑 나는 왕이지만 그래도 많이 친하잖아.”


  쇼우케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가타부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요코는 괜히 더 변명해야 한다는 희한한 의무감에 사로잡혔다.


  “그런데 연왕이라 부르면 너무 거리감이 느껴지니까…. 연왕께서도 언짢아하시는 듯하고. 그래서 사적인 자리에서는 그렇게 부르기로 했어.”


  간신히 말을 마치고 슬쩍 눈치를 살핀다. 쇼우케이는 입을 꾹 다문 채 요코를 빤히 노려보았다. 정말 이게 단데. 뭔가 더 이야기해보려 해도 정말 이것뿐이니 할 말이 없다. 요코는 목을 움츠린 채 마치 벌을 기다리는 어린 아이처럼 여사를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일방적인 대치전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쇼우케이는 입을 열었다.


  “그뿐?”


  그리고는 너무나도 짧은 한 마디. 요코는 긴장해 그녀의 입술에 집중하고 있다가 어안이 벙벙한 채 되물었다.


  “응?”

  “그뿐이냐는 말이야.”

  “으, 으응. 그런데.”


  말끝을 흐리며 저를 올려다보는 요코의 눈에 거짓은 없다. 쇼우케이는 어이가 없어 가볍게 얼어붙었다. 그런데 왜 그런 남들 오해할 만한 호칭을 쓴단 말이야? 그녀는 확신을 구하기 위해 요코에게 못을 박았다.


  “연왕께 다른 마음이 있는 건 아니고?”

  “다른 마음? 어떤 마음?”

  “두 사람, 남몰래 정분이 났다거나.”

  “으힉?!”


  목소리를 낮추고 은밀히 묻는 말에 요코는 저도 모르게 그 자리에서 반쯤 튀어 올랐다 푹 꺼졌다. 온몸이 들썩일 정도로 극명하게 보여주는 반응에 쇼우케이는 이보다 확실한 반응은 없군, 하고 속으로 쓴 웃음을 삼켰다. 그렇다면 대체 왜 그런 호칭을 썼단 말인가. 그렇잖아도 사이가 남달라 관들의 오해도 심심찮은 마당에 그런 호칭을 주고받는 것까지 들키면 두 사람의 마음이 어떻든 간에 기정사실화가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요우시, 연왕과 친하게 지내는 건 좋아. 다른 관들이 뭐라 말하든 난 요우시가 같은 왕과, 그것도 태과 출신인 왕과 가까이 지내는 거 싫지 않아. 아주 만약의 일이지만 그게 더 깊어져 연인이 된다 하더라도 걱정은 되지만 떼어놓고 싶다거나 하지는 않을 거야.”


  요코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쇼우케이가 왜 이런 말을 꺼내는지 알 수 없었다. 방금 전부터 이상하다. 쇼우케이는 자꾸 연왕과 저를 이상하게 엮고 있었다. 그분과 나는 그런 사이가 아닌데. 그렇잖아도 그리 보는 시선들이 있음을 알아 조금 거북하던 참인데 굳이. 그녀는 속내를 알 수 없는 쇼우케이의 말에 일단 경청하는 반응을 보여주었다. 가만히 듣다 보면 그녀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녀가 뒤잇는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그렇다 해도 연인도 아닌 사람에게 요우시가 그런 호칭을 쓰는 건……. 아무리 연왕께서 맘 넓게 허락하셨다 해도 좀 그렇잖아?”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연인이라니. 그런 호칭이라니. 좀 그렇다는 말은 대체 무슨 뜻이란 말인가. 요코는 불길함을 느꼈다. 구물거리는 불안감이 흙탕물처럼 부하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찜찜했던 순간들이 머릿속을 쏜살처럼 꿰고 지나갔다. 쇼류의 측근들, 하계에서 찰나 스쳤던 탁랑군의 반응. 그건 역시 어딘가 좀 켕기기는 했다. 그래도 그러려니 지나쳤는데.


  “쇼우케이. 혹시. 정말 만에 하나 싶어서 묻는 건데. 아랑이라는 호칭, 누가 누구한테 쓰는 거야?”

  “설마 요우시, 너 뜻도 모르고 쓴 거야?”

  “빨리. 일단은 내가 묻는 말에 먼저 대답해줘.”

  “여자가 남자한테 쓰는 말이지.”


  얼결에 대답하는 쇼우케이의 손목을 세게 붙잡았다. 요코의 눈에 무언가 첨예한 불꽃이 타고 있었다. 쇼우케이는 당황한 채 그녀를 내려다보았고 요코는 채근하는 마음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그뿐?”

  “호칭에 뭐 그리 특별하고 복잡한 의미가 있겠어. 다만 그건 아무 사내에게나 쓰지 않을 뿐이……지.”


  말하다 말고 쇼우케이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말끝이 흐려진다. 간신히 말을 마친 쇼우케이의 눈에 설마, 하는 짙은 의혹의 빛이 드리워졌다. 요코의 얼굴도 불안함으로 달아올랐다. 두 사람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서로를 못 박힌 채 쳐다보았다. 그리고 쇼우케이의 입술이 홀린 듯 열렸다.


  “남편이나 정인을 친근하게 부르는 호칭이야.”


  요코의 눈에 불이 번쩍 빛났다. 그리고는 새까맣게 암전됐다. 세상에. 쇼우케이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거지? 그녀는 간신히 비틀거리는 몸을 책상에 기대고 멍청히 눈을 깜빡였다. 그 와중에 쇼우케이 역시 당황했는지 제 친우의 안색은 살피지도 못하고 중얼중얼 장황하게 설명을 늘어놓고 있었다. 마치 요코가 이 세계에 대해 물었을 때마다 알기 쉽게 여러 마디로 풀어 설명해주던 바로 그것처럼.


  “가벼운 연인 사이에는 쓰지 않고 최소한 혼약이나 미래를 약조한 깊은 정인 간에 쓰는데 요즘은 그마저도 찾기 어려울 정도로 굉장히 예스럽고 고아한 호칭이야. 하계에서는 잘 안 쓰는 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촌스러워서라거나 몰라서라거나 그런 건 아니고, 말의 의미가 워낙 무겁고 깊다보니 잘 쓰지 않으려는 경향 쪽이지.”


  요코는 연타로 터지는 충격 속에 무방비하게 노출된 채 멍하니 눈만 깜빡였다. 그리고 그것들을 이해할 수 있을 무렵 점점 발그스름하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어디까지가 머리카락이고 어디부터가 얼굴인지 모를 정도로 붉어진 얼굴은 목이며 귀까지 홧홧하게 불태우고 있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분명 슈코우 씨는 친근한 남성을 이를 때 쓰는 호칭이라고. 


  거기까지 떠올린 그녀는 그제서 제가 그 똑똑한 안국의 신하에게 속았음을 깨달았다. 그는 분명 거짓을 고하지는 않은 것이다. 제가 확인조차 없이 덥석 그렇구나, 했으니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다른 신하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기기괴괴하게 물들었던 것이겠고, 주국 탁랑군이 놀란 웃음을 지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아니, 그런데. 어째서 연왕은 아무 말씀 없으셨을까. 아니, 도리어 계속 불러도 된다며 권하기까지 했다. 


  요코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처음부터 짰는지는 모르겠지만 주종이 맘먹고 저를 골린 것이 분명했다. 어쩐지. 아랑, 하고 부를 때마다 그는 필요 이상으로 웃는 기색을 보이고는 했다. 그것이 잘 속고 있군, 하고 비웃는 것이었다면. 요코는 민망함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현영궁 전체가 날 놀리다니.


  생각해보면 볼수록 더 민망했다. 그는 요코의 호칭이 바뀐 이후부터 저를 너라 하지 않고 당신이라 했다. 존중하는 의미라며 웃어주셨는데. 그것은 결코 평범하지 않은 호칭이었던 것이었다. 아랑에 당신이라니. 여보당신 하는 것과 대체 무슨 차이란 말인가. 아니,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다. 

  요코는 책상에 얼굴을 묻었다. 바보, 멍청이. 진작 환궁해서 쇼우케이에게 물어봤어야 했다. 그 이상한 반응들을 그대로 묻어서는 안 되었다. 몰랐을 때야 그렇다 쳐도 이제 연왕이며 현영궁 신료들의 얼굴을 어떻게 본단 말인가. 속인 것은 그쪽이고 속은 것은 자신이니 분명 억울한 것도 이쪽이다. 따져 사과를 얻어내면 그뿐이지만 문제는 제가 이것을 차마 언급할 수조차 없다는 것이었다. 제 시대의 봉래로 치면 지금까지 신나서 여보야, 자기야 한 셈인데 그게 민망하지 않을 턱이 있나.


  “요, 요우시. 괜찮아?”


  괜찮아 보이니. 괜찮을 리 있니. 요코는 고개를 묻은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차라리 모르는 것이 나을 뻔했다. 대체 슈코우는 왜 그런 호칭을 제게 가르쳐주었을까. 설마 저처럼 몰랐을까. 아니, 자주 쓰지 않다 뿐이지 저자의 평민들도 아는 호칭인데 오백년 이상을 산 선인이 그 의미를 몰랐을 리는 없지 않은가. 그 옆의 다른 신하들도, 불리는 쇼류마저도. 

  요코는 쇼우케이를 향해 혼자 있고 싶다는 양 물리는 손짓을 했다. 쇼우케이는 어쩔 줄을 모른 채 달래주어야 하나 같이 욕이라도 해주어야 하나 망설이다 결국은 어명을 거스르지 못하고 뒷걸음질 쳐 물러났다. 


  요코는 그 후로도 한참을 죽은 듯 엎드려 있다가 비틀거리며 침대로 들어가 깊이 파묻혔다. 그리고는 웅크린 채 또 한참을 미동도 않고 있었다. 괘씸하다느니 억울하다느니 하는 사소한 문제는 지금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속은 것에 대한 분노보다도 앞으로 어떤 표정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가 더 큰 문제였다.


  “난 몰라.”


  간신히 입술을 비틀어 나오는 말은 열띤 기색이 함빡 묻어 있다. 요코는 급기야는 작게 울먹이며 몸을 한껏 옹송그렸다. 정말 몰랐으면 좋겠다. 정말 난 딱 모르는 일이었으면 좋겠어. 한탄 같은 생각이 번뇌로 이어지는 밤, 그녀는 결국 밤잠을 꼬박 설치고야 말았다.




  쇼류는 닫힌 새의 부리를 빤히 쳐다보았다. 

  현영궁의 정점 깊숙이 숨은 정침. 그 안에서도 몇 겹의 휘장을 거쳐야만 간신히 모습을 드러내는 침상. 낮도 밤도 없이 어슴푸레 깔린 어둠만이 적막한 침상에서 그는 비스듬히 누운 채 한 번 더 새의 부리를 톡톡 두드렸다. 다시 한 번 전해달라는 부드러운 요청에 그것은 잠시 목을 울리다 가느다란 소녀의 목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빠짐없이 주의 깊게 서신을 전해들은 쇼류는 쓰게 웃으며 침대 머리맡에 느슨하게 몸을 기대었다. 


  볼 성 사납게 풀어진 채 뻗어 내리는 강철 같은 머리칼은 가슴팍을 거의 드러내고 마는 흐트러진 침의 차림과 어우러져 평소와는 색다른 느낌이 들게 했다. 분명 언제고 예의 없이 흐트러진 차림을 보이고는 했지만 동시에 어딘가 단단하게 매듭을 묶어놓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건만. 홀로 있는 지극히 사적이고 안전한 공간에서는 그 또한 느슨해지게 마련이었다. 


  느긋한 모습으로 반신을 일으킨 쇼류는 새의 목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려주며 비식 웃고 말았다. 이런. 아무래도 들킨 모양이다. 그는 새가 서궁에서 쉴 수 있도록 팔을 탄력 있게 뻗어 날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면.


일단 끗



근 두달도 넘겨 간신히 나온 아랑이지만 여기서 끝내면 재미 없겠죠.

사실 요코가 밤을 꼬박 새웠다는 부분에서 끝내고 내키면 이어야지, 했지만 쇼류 부분을 짧게 더 이어 쓰며

결국 몇 편 더 이어쓰기가 확정이 나버렸습니다. 그때부터는 쇼류가 제대로 요코를 흔들어놓을 거예요.


글 잘 쓰고 싶어요.....ㅜㅜ 금손 좀.. 나도 존잘이 되고 싶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