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점이 다르니 사건도 조금 다르지만 결국 궁극적으로 한 점에서 만납니다. ...음? 한국말 어렵네요^q^
가볍게 쓸까 무겁게 쓸까 하다가 가겁게 써짐ㅠㅠ 혹은 무볍게 써짐ㅠㅠ =망하뮤ㅠㅠㅠ
※ 특히 뒤에서 급 망가짐 주의. 졸리니 더는 보고 싶지 않은 글이다. 더 짜내고 싶지 않은 글이기도 합니다. 으?? 으???
2013/10/21 - [이차창작문] - <십이국기>[쇼류요코]이름의 무게
사람이 살아가는 곳에는 반드시 중심이 있게 마련이다. 상세를 구성하는 섭리는 세계의 중심, 봉산에서 태어나며 백성을 통치하는 방향은 나라의 중심, 수도에서 이루어진다.
이 세계의 중심에는 산이 있다. 각 나라의 통치자를 선정하는 하늘의 권리를 부여받은 기린. 각 나라에 오직 하나뿐이 있을 수 없다는 영묘한 신수가 태어나는 곳은 세계의 중심에 솟은 봉산의 사신목뿐이다. 각 나라에 역시 아홉 개의 산이 있다. 아홉 개의 주는 저마다 산이 미치는 범위로 구역을 나누어 백성들을 다스리게 된다. 왕을 선정하라는 천계를 부여받은 기린이 내리는 곳, 이치와 도로 백성을 다스리는 곳 모두 산에서부터 비롯된다. 높은 곳에서 흘러내려 가장 낮은 것을 두루 살피고 영향을 미치듯 한가운데, 정점에서부터 치맛자락을 펼친다.
나라의 수도 역시 나라의 정 중앙에 있으며 그것을 다스리는 이는 그 중에서도 가장 가운데에 존재한다. 나라를 자로 재 그 중앙을 표시할 수 있다면 아마 분명 왕궁의 정침에 닿을 것이다. 왕의 안녕으로 나라의 번영이 시작되고 유지되며 스러지는 이 세계에서는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사대국의 동편에 위치한 경국의 현 여왕 세키시. 등극 초의 불안을 잠재우고 그 치세는 거의 백여 년에 이르렀다. 여왕의 치맛자락에 짓눌려 상처 많았던 백성들은 하나둘씩 세월에 휩쓸려 선대 여왕들의 세대를 경험한 하계의 인간은 더 이상 남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근래의 명군이었던 남자 왕, 달왕을 찾으며 회달을 부르짖는 일이 없었으며 여왕을 치맛바람이나 휘두르는 폭군이라 비하하며 욕하는 일 또한 없었다.
백성은 여왕을 떠올릴 때 끝 간 데 없이 퍼진 치맛자락을 연상하고는 했다. 사람 사이의 고저가 남아있는 이 세계에서는 신분이 높을수록 폭 넓은 소매와 바닥까지 끌리는 복잡하고 화려한 옷을 입는다. 그들은 귀하디귀한 지존의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차림을 떠올렸다. 그리고 끝이 보이지 않는 그 치맛자락이 저들을 포근히 덮어 지켜주고 있다 생각했다. 나라의 중앙, 가장 높은 곳에서부터 시작되어 부채꼴 모양으로 넓게 퍼져 국경까지 아울러 부드럽게 깔리는 비단자락. 과거에 백성들은 말했다. 이래서 여왕이란. 그리고 현재를 살아가는 백성들 역시 말했다. 이래서 우리 여왕님이란.
그리고 나라의 정 가운데. 여러 개의 문으로 감싸인 공간과 여러 겹의 휘장으로 둘러싸인 침대 위에서 소녀가 꿈에서 쫓겨나오듯 몸부림치며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거칠게 날뛰는 숨과 무섭게 오르내리는 가슴이며 어깨가 불안정하게 요동친다. 그녀는 초록빛 안광을 뿌리며 이불을 걷고 침대를 뛰쳐나와 몇 겹의 휘장을 걷었다. 신발조차 신지 않고 뛰쳐나와 향한 곳은 웬 검이 장식되어 있는 벽이다.
경국 비장의 보물 중 하나인 수우도. 물로 이루었다고 하는 칼날은 푸른빛을 머금고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것 물방울 같은 청명한 소리가 잔상처럼 귀를 좀먹었다. 그녀는 허탈한 듯 멍하니 그것을 들여다보다 맥 빠진 걸음으로 다시 침대를 향했다. 그런데 인기척조차 없었던 침대 위에 낯선 이가 앉아있었다. 소녀는 익숙하다는 듯 그것을 무시하며 중얼거렸다.
“내일 조의가 있어. 조금이라도 자둬야 하니 방해하지 마.”
“어차피 한 번 깨어나면 다시 잠들지 못하고 새버리잖아?”
“그래도 자야 해.”
푸른 원숭이는 소녀가 침대 위로 오르자 몸을 웅크리고 뛰어올라 가볍게 뒤로 물러났다. 그녀는 거칠게 걷어냈던 이불을 다시 몸 위로 끌어 덮으며 누웠다. 원숭이는 그녀의 머리맡으로 다시 도약하여 다가서 빤히 내려다보며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이봐, 경왕. 악몽이라도 꾼 거야?”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경왕이라 불린 소녀는 눈을 감으며 차갑게 대꾸했다. 그녀는 경의 여왕, 세키시였다. 푸른 원숭이는 그 곁을 이리저리 뛰어올라 맴돌며 그녀를 혼란시키듯 말을 걸었다.
“칼날이 무엇을 보여줬나?”
“시끄러워, 그만 검 집으로 돌아가.”
수우도의 우는 원숭이를 이르는 禺. 그녀를 맴도는 푸른 원숭이는 바로 검 집의 환영이다. 그녀가 홀로 있을 때만 모습을 드러내며 사람의 마음을 읽어 제 주인에게 전한다. 하지만 그것은 봉인에 눌러두었을 때의 일이며, 그녀가 혼란에 잠기게 되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주인의 마음을 읽어 혼란시킨다. 강대한 요마를 잡아 죽이는 대신 검 집에 눌러놓은 것이다. 그것은 그녀가 조금이라도 마음에 틈을 보이면 그 틈새를 교묘하게 파고들었다. 바로 지금처럼.
“이봐, 요코.”
낯선 호칭에 번쩍 눈을 뜬다. 그리운 호칭이다. 불리지 않은지 너무 오래되어 그녀 자신조차 제 이름을 잊어버릴 정도로 까마득히 오래된 이름이었다. 불에 덴 듯 들려 올라가는 속눈썹이며 눈두덩에 원숭이가 자지러지게 웃었다. 굳이 생각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조롱하는 웃음이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원숭이를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종국에 상체를 일으켜 그것을 노려보았다. 그때까지도 원숭이는 배가 찢어져라 시끄럽게 웃고 있다. 소녀는 참을성 있게 입을 다문 채 날선 눈빛만을 던졌다.
“솔직해져 보는 건 어때? 나와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아니야? 요코.”
“닥쳐.”
드물게 던지는 욕설은 으르렁거리는 듯한 신음을 동반한다. 상처 입은 짐승이 내는 소리만큼 안타깝게 웅크러져 있다.
“추억 팔이라도 하고 싶은 건가? 나는 나카지마 요코. 경왕 세키시이기 이전에, 요우시이기도 훨씬 전부터 나는 요코였어.”
나무를 깎아 만든 울상의 가면을 쓴 원숭이가 연약한 목소리를 흉내 낸다. 그것은 고통에 젖은 목소리를 우습게 희화화하여 과장된 몸짓과 함께 그녀를 짓밟았다. 소녀는 입술 안쪽을 질끈 깨물고는 새빨갛게 열이 오른 눈시울로 그것을 노려보았다. 원숭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침대 위를 서성인다. 그리고 가면을 비스듬하게 끌어내리고 반쯤 얼굴을 드러낸다. 그 얼굴에 드러나는 것은 확연한 조소다.
“이봐, 네가 요코였든 그렇지 않든 뭐가 중요하지? 넌 결국 경왕이고, 왕이 되기 위해 요코로서의 삶은 포기했어. 이미 기린의 서약을 받는 순간 인간으로서의 넌 죽어버린 지 오래라고!”
“시끄러워. 듣고 싶지 않아.”
“이미 알고 있는 걸 애써 무시하지 마. 똑똑해져 보라고. 왕이 아니었으면 넌 진작 이미 죽어 없어졌을 목숨이야. 현명하게 네가 처한 상황을 봐. 지금 네 주변에 네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 있나? 네 근본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어? 넌 왕으로서 효용가치가 있을 뿐이야. 왕은 그저 왕일뿐이야. 인간적인 기억도 감정도 무엇 하나 필요 없어. 기린은 천의를 담는 그릇이잖아? 왕은 마땅히 민의를 담는 그릇이어야 해. 그것만으로 가치를 다하는 삶일 뿐이라고. 그 길에 나카지마 요코는 필요 없었던 거야.”
“시끄러워, 닥치라고 했어.”
“하늘이 왜 왕과 신하를 다르게 만들었다고 생각해? 왕이나 신하는 불로불사야. 신하는 자리에서 물러나 언제든 제 천수를 누리고 살 수 있어. 하지만 왕은 달라. 제 인간으로서의 수명을 강제로 태워 없애고 왕에 오른다. 그 의미를 정말 몰라?”
소녀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지척에 얼굴을 들이댄 푸른 원숭이의 눈을 마주보았다.
“왕이란 게 그만큼 백성을 위해 절박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순진하긴.”
원숭이는 딱하다는 듯 조소했다. 그녀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은 듯 미간을 찌푸렸지만 원숭이는 잔혹할 정도로 담담한 어조로 뒤를 이었다.
“잘 봐. 왕이라는 제물로 선택된 이상 이제 나카지마 요코라는 객체는 필요 없는 거야. 왕으로서 존재하고 군림하기만 하면 된다고. 넌 경왕이야. 측근들도, 소중한 친우들도 그렇게 말해. 너를 하대하는 사람은 없고 너와 동등하게 서는 사람도 없어. 왜냐면 넌 왕이거든.”
“닥쳐!!!”
그녀는 거칠게 팔을 휘저었다. 원숭이는 그것을 피해 저만치 여유롭게 휙 도약하여 물러나고는 다시 귀가 째지는 웃음을 내었다. 당실 내를 진동하는 시끄럽고 경박한 웃음소리다. 그녀는 두 귀를 틀어막고 질끈 눈을 감았다. 무릎을 세워 끌어안고 잔상처럼 남은 원숭이의 웃음소리에 맞서 그녀는 텅 빈 눈으로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나는 나카지마 요코야. 경왕이기 이전에 나 자신이란 말이야.”
그리고 동시에 원숭이는 자신의 환영임을 이해하는 목소리가 가슴 속 심연으로부터 답해왔다.
“왕이 아닌 나는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거야.”
춘관장 대종백은 당실의 문을 조용히 열었다. 그녀가 지금 들어서는 곳은 왕의 침소로, 허락을 구하지 않고는 절대 들 수 없는 불가침구역이었지만 그녀는 적왕조의 즉위 초 여사의 직을 임명받았을 때부터 언제든 침전을 들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본래는 밖에서 고하고 입실해왔으나 최근 며칠은 그렇지 못했다. 늘 잠을 설치다 새벽에 쪽잠을 드는 것인지 부쩍 아침잠이 늘어난 주인 때문이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칸막이 너머의 넓은 공간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뜻밖의 광경을 보았다. 왕은 벌써 기침하여 탁자 위에 앉아있었다.
“주상, 기침하여계셨습니까.”
“잠을 일찍 깨서.”
붉은 머리칼을 늘어뜨리고 침소의대 차림을 한 여왕이 가볍게 웃는다. 대종백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주인을 살폈다. 잠을 일찍 깬 것이 아니다. 잠을 설친 것이다. 감정을 전부 드러내 보이고 말던 순진한 얼굴은 어느새 가면을 쓰고 그것을 치장하는 것을 익혀 점점 그 너머의 얼굴을 감추는 것에 능숙해졌다. 하지만 그녀 역시 측근에서 오랫동안 함께 머물며 왕을 보아왔기 때문에 그녀가 감추려 하는 바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최근 불면에 시달리는 주상을 알고 있다. 하지만 슬쩍 떠보는 질문에도 그녀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견고하게 빗장을 닫아거니 이렇다 다가서는 것조차 점점 더 어려워졌다. 감추고 싶은 일. 대종백은 그렇게 생각하고는 이후로 절대 캐내려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숨기고자 하는 것은, 피하고자 하는 것은 설령 이미 알고 있다 해도, 보고 들었다 해도 눈 감고 귀 막아 못 본 체, 못 들은 체 해주고 싶었다. 그것이 측근이자 친우였던 그녀가 왕에게 드릴 수 있는 최대한의 마음이었다.
“그런데 조의까지 여유가 있으니 목욕 좀 할 수 있을까? 밤새 더웠는지 땀이 났던 게 좀 찝찝해서.”
“여유롭게는 무리겠지만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고마워. 쇼우케이.”
대종백 쇼우케이는 고개를 숙여 예를 차렸다. 그리고 물러나며 그녀를 등지기 무섭게 화사했던 얼굴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 이상은 숨길 수 없었다. 그녀는 제 주인의 모습을 떠올렸다. 식은땀에 푹 젖어 머리카락이 붙은 목덜미며 착 달라붙은 침의. 널따란 소매 안으로 슬쩍 엿보이는 손끝은 자그마한 떨림을 품고 있었다. 요우시. 여사는 차마 그녀의 면전에서 부르지 못했던 이름을 쓰게 삼키며 눈을 감았다.
간단한 목욕을 마치고 나온 그녀는 가운처럼 걸치고 있던 얇고 단출한 홑겹의 의대를 여어가 풀어 벗기는 것을 시선의 끝으로 내려다보았다. 곧 물기가 완전히 마르지 않은 나신이 드러나자 여어 몇몇이 붙어 부산스럽게 물기를 닦아내고 향유를 발라주었다. 푹신하고 보송보송한 수건을 든 여어들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꾹꾹 눌러 말리고 그 중 가장 어린 모습을 한 소녀가 가장 안쪽에 입는 속옷을 입혀주었다. 그녀는 담담한 표정으로 여어들이 불편하지 않게 일을 할 수 있도록 인형처럼 서있었다. 남에게 속살을 보이기 부끄러워 주위를 물리치고 혼자 옷을 입거나 목욕을 하던 때는 이미 까마득한 아주 오래 전의 이야기다.
그녀는 차례차례 의장의 정제를 돕는 제 나이 또래의 소녀에게 시선을 두었다. 그녀도 언젠가 자신을 요코라 불러주었던 때가 있었다. 그마저도 이제는 흐릿해 과연 정말 그랬던 적이 있었는지조차 의심이 갈 정도지만.
그녀는 주상으로 하여금 화려한 유를 걸치게 하고 소매가 없이 무릎까지 닿을 정도로 긴 상의를 위로 걸치게 한 뒤 비단 요대를 가슴 위로 감고 주렁주렁 노리개와 장식을 매단 뒤 우아하게 매듭지어 늘어뜨렸다. 머리의 단장을 맡은 여어들 역시 저들끼리 의상의 문양이나 무늬, 색상이나 모양을 이것저것 살펴가며 어울리는 장신구나 머리 모양을 상의하여 이리저리 빗고 땋고 틀어 올렸다가 풀어 늘어뜨리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무거울 정도로 화려한 비녀를 몇 개나 꽂아 장식하고 떨잠이니 뭐니 하는 것들을 또 꽂아 놓았다. 마지막으로 옷의 소매며 주름을 다시 한 번 손봐주고는 등을 덮고 팔을 감싸 흘러내리는 숄 같은 피백을 걸치게 했다. 땅까지 끌려 늘어지는 유와 군과 피백의 자락에 잠시 시선을 둔 그녀는 여어들을 죽 둘러보고 마지막으로 최측근의 수수하고 귀여운 소녀를 보았다.
“늘 고마워.”
“인사를 받을 만한 일이 아닙니다, 주상.”
귀여운 목소리가 단정하게 답한다. 겸손하게 숙인 고개를 한없이 쳐다보던 여왕은 마침 문 쪽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문득 돌아보았다.
“아, 케이키.”
“평소보다 늦어지시는 듯하여…….”
“아아. 아침에 목욕을 하는 바람에.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그녀는 가볍게 웃고는 문을 향해 나섰다. 즉위 초 관리의 조복을 입고는 했다던 그녀는 확실히 여왕의 의대를 갖추고 있었다. 밝고 화사한 여왕의 모습을 한 소녀는 탈색한 금발을 종아리까지 늘어뜨린 훤칠한 미남자를 지나쳐 정침을 빠져나갔다.
재보와 우두머리 격으로 보이던 어린 여어의 눈이 짧게 마주친다. 사실 이 소녀는 여어가 아니었다. 천관에서 대재 다음으로 높은 직위인 소재. 봉래 출신으로 여왕 세키시의 즉위 초부터 여어로서 그녀를 모셔왔던 측근 중 하나다. 소재. 주상께서는. 그렇게 묻는 눈에 여왕과 같은 나이 또래의 얼굴을 한 수수한 소녀가 침울한 얼굴로 티 나지 않을 만큼 고개를 젓는다. 두 사람의 차마 내뱉을 수 없는 한숨이 교차하고 재보는 주상을 따라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육관과 삼공이 모두 참여하는 가장 큰 조의가 있다. 여왕이 단상에 올라 옥좌에 좌정하자 조의는 속도감 있게 주된 안건을 축으로 하여 각부가 자유롭게 토의를 하는 식으로 진행되었고 그녀는 관리에게 묻고 혹은 의표를 찌르는 등 성실하게 참여했다. 간혹 추관 중 어느 하나가 그녀를 걱정스럽게 올려다보았으나 그녀는 못 본 척 무시했다. 잿빛의 머리칼을 자연스럽게 양옆으로 넘긴 부드러운 인상의 젊은 남자의 모습을 한 관리다. 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이번에는 옥좌의 곁에 선 재보를 쳐다보았다. 재보는 그것을 내려다보고는 남몰래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안도하듯 고개를 수그렸으나 이내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재보와 추관의 젊은 신료가 나누는 눈빛을 의식 밖으로 밀어냈다.
빛이 꺼진 듯 죽은 시선을 하고 있었던 것은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재보 케이키는 생각했다. 그것은 아마 한두 해에 걸쳐 일어난 쉽고 얕은 문제는 아니었다. 애초에 그에게 있어 전부인 왕에게 일어난 문제에 쉽거나 얕음이 있을 리 없다. 측근은 언제부터인가 그런 것을 느끼고 있었다. 왕과 재보의 최측근에서 자문을 드리는 삼공을 비롯하여 총재 코우칸, 하관장 대사마 칸타이, 금군 우장군 코쇼우, 천관의 소재 스즈, 춘관장 대종백 쇼우케이, 추관장 대사구 락슌, 영주 주재 셋키 등 즉위 초부터 그녀의 바로 곁을 지키고 성심껏 보필하여 정점에 이르는 높은 직위를 얻은 측근들은 모두 알게 모르게 느끼고 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온한 느낌이 왕을 좀먹고 있다.
그것은 그저 불온한 감각이 기원해오는 원인을 익히 깨달아 알고 있는지 아직 알지 못하는지 정도의 차이일 뿐이었으며, 그녀의 인생 중 가장 밑바닥에 이르렀던 시기를 함께 한 추관장은 머지않아 왕의 고통의 기원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대사구는 재보를 찾았고 재보는 상의 끝에 그녀와 특별한 교분을 나누며 동시에 동등할 수 있는 신분에 있는 연왕을 청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안의 상징 색을 꽁지깃으로 한 란은 인중전으로 방문했다. 운해 위 금문을 열어. 리카쿠의 등을 빌릴 거다. 명랑함도, 쾌활함도 빠져 깊을 정도로 낮고 차가운 목소리는 말했다.
세키시는 멍하니 내전에 앉아있었다. 이미 검토를 마친 두루마리들이 한쪽으로 가지런히 정돈되어있는 것을 쳐다보고는 눈을 깜빡였다. 영주의 축제는 막바지에 이르렀다. 슬슬 결산에 대한 보고가 올라오고 있다. 마무리에 대한 일정과 여러 손익이 정리된 문서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최근 몇 년 그녀는 축제에 참여해본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이 나라에 처음 도입하게 된 체계가 그럭저럭 쓸 만하게 돌아가는지가 궁금해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하러 기대 반 불안 반으로 내려갔고 어느 정도의 체계가 잡힌 이후로는 바쁜 정무며 책무에서 하루 이틀 정도는 일탈하고 싶어 즐기러 내려갔다. 십여 년 전 즈음부터는 무언가 쫓기듯 불안해 소란스러운 활기로 잊기 위해 내려갔고 최근 몇 년은 도리어 그 활기가 두렵고 끔찍해 갈 수 없었다.
빛이 있는 곳에 그림자가 있다. 어느 한쪽이 두드러지면 다른 한 쪽도 두드러진다. 낮은 물론이거니와 한밤중에도 불야성으로 대낮같이 시끄럽고 밝은 빛 무리 속에서 그녀는 어이없을 정도로 새까만 그림자고 어둠이었다. 만남과 헤어짐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화려한 사교의 장. 그 안에서 그녀는 자기소개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름이 뭐냐 묻는 간단한 질문에조차 멈칫 서버리고는 넋 나간 사람처럼 눈을 깜빡였다. 기억이 나지 않았다. 불리어왔던 호칭들은 주상, 경왕, 전하, 주인, 여왕. 온통 왕을 이르는 직함뿐이다. 뒤늦게 요우시, 하며 대답했지만 그것은 끝내 말로 못할 충격을 안겼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름을 잊고 있었다. 내가 나임을 잊고 있었다. 그렇다면 최근 몇 년 쌓아올린 정무며 치세는 내가 나로서 행한 일이 아니었던 것인가. 나는 언제부터 내가 아니었던 걸까. 나라는 객체를 인지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백성의 입장을 잊는 순간이 되었을 때 왕으로서는 괜찮았던 것일까. 그럭저럭 잘 해내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것은 요행이었고 어디부턴가 이미 잘못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걸까. 그 모든 것을 떠나, 나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흘러와 어디로 가고 있으며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누구에게도 불리지 않는 나는 이미 나카지마 요코라는 객체로서 끝나버린 것이 아닐까.
케이키는 말한다. 기린은 천의를 담는 그릇이며 개인의 감정은 있을 수 없다고. 그렇다면 그녀는 나카지마 요코를 죽이고 언제부터인가 저도 모르는 새 그릇이 되어버린 것일까. 천의를 담고 민의를 담아 관리로 조화를 꾀할 뿐인, 정작 제 것 하나 없이 텅 빈 그릇. 수많은 질문이 봇물처럼 터지고 나서야 그녀는 스스로가 항상 내심 불안해 해왔었음을 깨달았고, 그 생각에 이르는 순간 머릿속 깊은 어딘가에서 간신히 유지되던 말라비틀어진 무언가가 파삭 하고 깨져 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조당으로 향했다. 발이 제멋대로 이끌려 마치 몸이 억지로 질질 끌려가는 기분이었다. 앞세우는 이도 없이 따르는 이들도 모두 물리고 홀로 터덜터덜 걷는다. 기운 없이 축축 처지는 몸과 텅 비어 유리알 같은 동공은 마치 인형처럼 불쾌하고 소름 끼친다. 그녀는 멍하니 무언가를 떠올렸다. 그것은 수년 전이지만 가장 최근이었던 이맘때 요천에 내려갔다가 어린 남자아이와 나누었던 대화였다.
‘할머니? 할머니는 작년 겨울에 돌아가셨어요.’
소녀가 노파를 처음 만났던 때, 그녀는 양 갈래 머리를 말아 만두 모양을 한 열 살도 채 되지 않은 귀여운 여자아이였다. 호의로 숨긴 속내에 잇단 배신을 당하고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배척을 받아야만 했던 때 그녀를 구해낸 이는 비단 락슌뿐만이 아니었다. 부모자식 간에 관계를 쌓는 법조차 알지 못했던 그녀에게 서로를 의지하고 아끼는 방법에 대해 몸소 보여주었던 어린 소녀, 교쿠요도 그 중 하나였다. 연상이었던 이들이 하나둘 시간의 뒤로 물러나는 것만은 나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어렸던 소녀의 죽음으로 이제 그녀는 죽지 않는 몸에 대해 실감하게 되었다. 아마 그때부터도 조금씩 어딘가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고개를 숙이는 문지기 병졸을 무기적인 손으로 물리고 커다란 문비의 하나를 힘껏 밀어낸다. 무겁지만 소리 없이 열린 문틈 사이로 가느다란 몸을 비집어 들이고 등으로 밀어 다시 닫는다.
기함할 정도로 넓은 공간은 세월을 먹고 내부로 압력을 걸어 내린다. 단상까지 깔린 붉은 융단은 흐릿하게 검붉은 기를 먹고 있다. 천장까지 이어진 높고 넓은 창문은 좌우 양면에서 빛을 들이지만 정작 그것들은 넓은 공터와 견줄 만한 이 공간의 중앙까지 완전히 밝힐 수는 없었다.
그녀는 그늘진 단상 위 옥좌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문비에 등을 기대고 있던 그대로 주르륵 흘러내려 주저앉았다. 끔찍할 정도로 넓은 공간. 오전의 온기며 열기는 조의가 끝난 뒤 얼마간을 오래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떠나버렸다. 약간 오래된 것 특유의 먼지 내음이 나는 듯한 너른 공간에서 그녀는 몸을 옹송그리고 무릎 위로 얼굴을 파묻었다. 결국은 도망쳐온 곳이 조당이라니 기가 차 할 말도 없다.
“성실하네, 요코는.”
핫, 하고 숨을 집어삼키며 그녀는 고개를 든다. 비꼬는 듯한 목소리는 이미 익숙하다. 넓은 공간을 이리저리 살피던 그녀는 그림자가 두드러지는 조당의 구석을 노려보았다.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원숭이가 일순 사라지고 다시 나타난다. 이번에는 좀 더 가까운 쪽의 그림자 위로 서있다.
“이젠 한낮에까지 나타나는군.”
“한낮이라고 해도 다를 바 없지.”
틀린 말은 아니다. 원숭이는 그녀의 마음의 어둠을 읽는다. 가장 그늘지고 어두운 자리가 있으니 나타나지 못할 일도 없다. 검 집을 떼어놓고 여행할 때도 그것은 그녀를 어디까지나 쫓아다니며 괴롭혔다.
“그래서? 결국 도망친 곳이 조당이야?”
“도망친 게 아니야.”
“좀 더 똑바로 말해보는 게 어때? 도망칠 수 없었다고.”
찔러 들어오는 말에 입을 다문다. 고개는 저절로 무릎으로 향한다. 원숭이와 대화하게 되면 생각이 많아진다. 익히 스스로 느끼고 있지만 알려 하지 않았던 부분을 차갑고 냉정하게 꿰뚫는 말에 상처받는 것이 한 번. 그로 인해 스스로의 감정에 혼선을 겪어야 한다는 것이 또 한 번. 결국 너무나도 쉽게 부정적인 면으로 쓸려가 버리는 것을 억지로 붙잡고 버텨 정도를 벗어나지 않기 위해 변명하고 발버둥치는 것 또한 한 번.
“왕 따위가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니야. 옥좌가 탐이 났던 건 아니야. 나와 같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지 않았으면 해서, 그래서 왕이 된 거야.”
“그만 둬.”
“그런데 세키시. 너와 같은 사람이라는 게 대체 누구지?”
소녀가 다시 원숭이를 쳐다본다. 그 눈에 날선 독기는 더는 없다. 희미하게 옅어져서도 버티려는 의지를 원숭이는 비아냥거린다.
“넌 사람이 아니잖아.”
“나는…….”
“예전에 연왕이 말했던 거 기억해? 왕이 되는 순간 더 이상 백성의 기분은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고. 그간 상당히 막연하게 생각해왔을 텐데 말이야.”
의표를 찔린 듯 어깨를 움찔 떨고는 그 이후로 침묵을 지킨다. 의지로 말을 않는 것이 아니다. 할 수 없다.
“이제야 이해한 것 아니야? 왕이 아닌 너한테 효용가치는 없다는 것.”
“아니야.”
부정하는 목소리에는 힘이 없다. 원숭이는 물끄러미 소녀의 얼굴을 마주한다.
“쓸모없어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거야. 살기 위해서. 구차한 목숨을 영위하고 싶어서. 왕이 아닌 너는 존재에 의미가 없으니까. 그러니까 왕이 아닌 너 자신을 찾고 싶어 몸부림치면서도 결국은 이곳으로 왔지. 안 그래?”
“……아니야.”
목소리는 한 층 더 힘이 빠져 있다. 연명. 단지 그것만을 위해 옥좌를 버릴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가엾다. 경의 백성이 안타깝고 가엾다. 이제 겨우 학정에서 벗어난 백성들에게 안정을 주고 싶었다. 끝없이 고뇌하면서도 정치를 놓을 수 없었고 대임을 벗어던질 수 없었다. 관리의 조복을 벗고 여왕의 의대를 다시 갖추기 시작했던 것도 그 일환이었다. 회피하지 않고 그 불편한 무게를 다 받아들이겠다는 의지였다.
원숭이는 그녀를 못마땅하게 노려보았다. 희미하게 저항하면서도 결국은 끝내 한없는 수렁으로 잠겨버리는 주인의 모습이 가슴 트일 만큼 우스웠으며 연민이 들 정도로 불쾌했다. 원숭이는 빈손을 들고 그녀에게로 집어던지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바람을 가르는 느낌과 함께 수우도의 칼날이 그녀의 바로 옆으로 내리꽂혔다. 선명하게 빛나는 첨예한 칼날이 거울처럼 번쩍였다.
“그냥 죽어버리는 게 어때?”
“…….”
“꼴도 보기 싫군.”
미간을 일그러뜨리고 입가를 뒤튼 원숭이는 알 수 없는 얼굴로 그녀를 조롱하듯 쳐다보다 이내 사라졌다. 그 자리로는 새까만 검 집만이 남아 푸른 눈을 형형하게 빛냈다. 그녀는 칼날을 뽑아들고 그것에 비친 제 얼굴을 한참동안이나 내려다보았다. 비칠비칠 일어나는 몸은 꼭 끈으로 조정하는 인형의 움직임처럼 부자연스럽고 무기적이다. 그녀는 비척대며 걸어가 검 집을 주워 칼날을 꽂아 넣었다. 스르릉 하고 칼날이 검 집과 마찰하는 소리가 귓전을 긁고 곧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마무리된다. 그녀는 문 중앙에 서 멍하니 옥좌를 올려다보았다. 목이 아플 정도로 오랫동안 올려다보았다. 경왕 세키시가 아니라 나카지마 요코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던 자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자리.
그녀는 옥대를 풀었다. 아무렇게나 떨어뜨리는 동안 팔에 걸치고 있던 피백도 함께 미끄러졌다. 여왕을 상징하는 옷과 장신구를 모두 몸에서 떼어놓았다. 화려한 수가 놓인 비단옷들, 무겁게 주렁주렁 늘어진 노리개며 팔찌, 반지, 귀걸이 등의 장신구. 가죽을 무두질하고 비단을 덧댄 신발, 머리를 장식한 떨잠이며 틀어 올린 비녀들. 모두 여왕을 위한 물건이고 여왕을 상징하기 위한 물건일 뿐 그녀를 위한 물건들은 아니었다. 그녀는 얇은 소복 차림이 되고 나서야 문득 정신이 들어 주변을 돌아보았다. 어느새 가장 높은 곳에 올라 있었다.
소녀는 단상 위에서 수우도 하나만을 든 채 넓은 조당을 내려다보았다. 나라의 지존을 위해 만들어진 최고의 옷가지며 장신구들은 옥좌에 이르기까지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다. 그녀는 돌아서 눈앞의 옥좌를 내려다보았다. 왕으로서의 자신을 견딜 수 없어 전부 벗어내고 도피하려 해도 결국 도달하는 자리는 옥좌였다. 왕이 아니라 그녀라는 객체를 확인받고 싶어 하면서도 왕이 아니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스스로가 짊어진 무게를 알고 있다. 버림받지 않은 이상 먼저 버릴 수는 없다. 그 자리를 떠나고서는 그녀는 더 이상 그녀가 아니었다. 그것을 스스로에게 훌륭하게 확인시켜주었다.
소녀는 벗어나고 싶었어도 벗어날 수 없었던 옥좌로 조심스럽고 꺼림칙한 기색이 드러나게 앉았다. 세상에서 가장 낡고 피로 얼룩져 있는 그 무겁고 넓은 자리에서 작은 몸을 한껏 웅크렸다. 어머니의 태내 혹은 난과에서 웅크리고 있는 아기처럼 무릎을 가슴 앞으로 모아 끌어안고 어깨를 움츠렸다. 무릎과 가슴 사이로 비스듬하게 기댄 검만큼은 도저히 버릴 수 없어 끌어안았다. 숨조차 쉴 수 없는 무게가 밀려들었다. 가느다란 한숨을 신음처럼 뱉고는 그녀는 텅 비어버렸다.
소녀는 눈을 깜빡여 단상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조당은 붉은 노을과 이른 밤하늘에 침식되어 어두침침하게 끓는 색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로는 웬 인영이 서있다. 그것이 누구인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다만 왜 그가 이곳에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을 뿐. 언제부터 와 있었던 걸까. 정면을 향해 앉아있었건만 기척조차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녀는 어느 틈엔가 들어있는 낯익은 이를 조금 놀란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는 웃고 있었다. 다만 그 얼굴은 어딘가 일그러진 느낌이 들어 왜 저렇게 아픈 표정으로 웃는 것인지 궁금할 다름이었다. 그는 가볍게 손을 들었다.
“잘 있었나? ……요코.”
간단한 안부인사. 그리고 찬물을 얻어맞은 느낌. 요코는 몸을 떨었다. 얼음장을 막 깨부순 듯 시원한 냉기를 머금은 말이 미적지근하게 고여 썩어가던 머릿속을 일시에 씻어 내렸다. 귓전을 타고 머리로 스미고 가슴으로 흘러 이윽고 전신으로 퍼져간다. 겨우 하나의 호칭으로 인해. 그녀는 가느다란 숨을 집어삼키고 손을 뻗었다. 그는 너무나도 멀리에 서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당장 그가 필요했다.
“……이리로.”
그는 단상의 계단을 차곡차곡 밟아 올라왔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마치 그는 그녀의 혈관을 밟아 심장에 가까워지는 것만 같았다. 그의 모습이 점점 커질수록 심장이 뛰는 느낌이 점점 생생해졌다. 종국에는 온몸으로 지진이 일어날 것처럼 아찔했다. 꽉 막혀있었다는 느낌이 일시에 가실 만큼 벅찰 정도로 숨이 트이고 있다. 그는 수우도를 끌어안고 몸을 옹송그린 그녀의 앞 맨바닥에 비스듬히 털썩 주저앉아 한 팔을 옥좌 위로 얹어 기댔다. 격식은커녕 체면치레조차 전혀 없는 모습이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다만 확인해야 했다. 수우도의 원숭이를 제외하고 그녀에게 그 호칭을 불러준 이는 이미 모두 사라진지 오래다. 소녀는 검을 끌어안고 있던 두 팔을 풀어내 그에게로 눈높이를 조금 끌어내렸다. 동그란 어깨가 가라앉고 자그마한 손이 간청하듯 그의 팔을 붙잡았다.
“다시 한 번만…….”
“응?”
“다시 한 번만 불러주세요.”
그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약간 흔들리는 기색을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눈동자는 그보다 더한 막막함에 크게 요동치고 있을 터다.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미 그가 잘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그는 웃으며 그녀의 이름을 차분하게 담았다. 그것은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하고 쉬웠다.
“요코.”
“한 번만 더.”
“요코.”
“한 번 더.”
확인받고 싶어 몇 번이고 요구하는 목소리에도 참을성 있게 화답한다. 요코는 즉위 전부터 곁을 지켜주었던 안국의 연왕, 쇼류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웃는 얼굴로 마음을 어루만지듯 상냥하고 생기 넘치는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고 그녀는 살아있음을 벅찰 정도로 느끼며 스스로가 방금 전까지도 죽음에 이르고 있었음을 불현 듯 깨달았다. 요코는 쇼류의 팔을 붙잡고 있던 손을 미끄러뜨려 커다란 손등을 제 자그마한 손으로 덮었다. 몸의 떨림을 막을 수 없었다. 마주보고 싶은 마음은 가득한데 몸은 도무지 뜻대로 움직여주지를 않았다. 목소리의 한 자락조차도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가장 가까이에서 있는 그대로 전부 전해 듣고 싶었다.
요코는 후들거리는 몸을 그대로 미끄러뜨렸다. 이윽고 옥좌 앞 바닥에 나란히 마주보고 않은 두 사람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차오르는 감각이며 감정이 벅차 숨을 똑바로 쉬는 것만으로도 벅찬 와중 쇼류는 그녀의 뺨을 덮고 엄지로 가볍게 밀어냈다.
“그렇게 내가 반가워 울 정도야?”
그제서 그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자신은 울고 있었다. 요코는 웃었다. 말끝마다 매달아주는 제 이름이 신기해 웃음 지었다. 그의 입술을 타고 내리는 평범한 그 발음이 좋아 웃음이 멎지를 않았다. 뺨을 덮은 커다란 온기에 전신이 뭉근하게 녹으며 곧추세운 허리에 힘이 빠졌다.
그는 말해주었다. 그녀는 경왕이지만 동시에 나카지마 요코라고. 죽어 시대의 저 편으로 넘어가는 하계의 사람들로 인해 느껴버리는 혼자 남겨진 고독, 과거이자 동시에 끝 간 데 없는 미래가 되어 죽음으로 채워져 사방을 막힌 삶, 왕과 자기 자신이라는 양립할 수 없어 보이는 두 입장 사이에서 오는 정체성의 혼란. 그따위 것들에 휘둘려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요코는 그에게로 한껏 몸을 기울였다. 할 수만 있다면 그 입술에 귓가를 가져가 오롯이 그 달콤한 울림을 담아내고 싶었다. 겨우 생을 시작하며 얻었던 이름 하나에 그 모든 것이 넘칠 만큼 탐스럽게 담겨있었다.
“그런데 요코. 그 차림 좀 어떻게 안 되겠어?”
쇼류는 한숨과 함께 옥대의 잠금 쇠를 푼다. 비단으로 묶인 요대도 풀고 의장을 헤쳐 겉에 입은 포를 바로 벗어버린다. 그것이 부드럽고 커다랗게 미지근한 바람을 일으켜 흩날리더니 그녀의 등 뒤로 사뿐하게 내려앉았다. 요코는 그가 포를 걸치게 하고 풀어냈던 비단 요대로 가슴 아래에 투박스러운 매듭을 지어 묶는 것을 내버려두었다. 그저 그가 건네는 말이며 행동이 벅찰 정도로 기꺼울 뿐이었다. 그가 지금 마주보고 있는 것은 경왕으로서의 그녀가 아니라 요코로서의 그녀였으며, 베푸는 말도 행동도 배려도 친절도 전부 경왕을 위해서가 아니라 요코를 위해서였다. 그녀는 뛰어들 듯 그의 목을 끌어안고 매달렸다.
“잠, 잠깐만…! 요코?!”
거의 드물 정도로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지만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요코는 그의 어깨 위로 고개를 묻었다. 맞닿은 가슴으로 지끈거릴 정도의 맥동이 만났다. 아플 만큼 선명한 살아있는 감촉에 더 바짝 몸을 가져가 붙이고 매달린다. 움찔하고 놀라는 몸이 딱딱하게 굳어있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이쪽의 맥동이 메아리처럼 그의 가슴에 닿아 부딪쳐 돌아오는 것이 지금 느끼고 싶은 전부였다. 무기적인 그릇이었을 뿐이었던 몸이 요코라는 이름을 찾고 인간으로서 여전히 살아있음을 몇 번이고 확인시켰다.
경왕이 되기 위해 요코를 포기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누구도 포기하라고 하지 않았다. 요코는 뒤늦게 아파 울음을 터뜨렸다. 지난 시간이 얼마나 아팠는지, 치유 받게 되는 지금에서야 뼈저리게 느껴졌다. 쇼류는 소리죽여 흐느끼는 몸을 조심스레 수용하고 허리를 바짝 끌어안아 당겼다. 완전히 매달려버린 몸을 오히려 제 품으로 쓸어 담듯 끌어와 붙여놓고 머리며 등을 연신 쓸어주었다. 투박하고 거칠 것이라 느꼈던 손은 의외로 다정하고 상냥했다.
생각해보니 요코는 치맛자락을 널리 펼쳐 백성을 품고 쇼류는 제 두 팔을 펼쳐 요코를 품었다는 좋은 대구법.
그럭저럭 썼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마음에 안드는 부분들이 많네여.. 짝꿍글들이 똑같이 용두사미.. 맘에 안드렁...
늘 용두사미가 문제져.. 수미상관이라는 그럴듯한 마무리도 없고.. 처음이랑 끝이 딱 매듭지어져 굴러가는 느낌이 안드네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