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참, 깜빡했다!”

  “으악, 하, 하루카!”

  “엄마가 피로 회복에 좋은 거라고 오빠 입욕제로 쓰라고 했어. 거기 그거.”

  “드, 들어오지 마! 다 큰 여자애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에에? 상관없잖아. 오빠는 오빠니까. 아빠도 전혀 신경 쓰지 않잖아?”

  “아빠랑 오빠랑 같아?! 아빠는 아빠고 오빠는 오빠지! 아, 아스카까지?! 들어오지 말라니까! 알아서 할 테니까.”

  “에에, 치사해. 예전엔 우리랑 같이 목욕도 했으면서.”

  “……치사한 건 굳이 따지면 너희 쪽이야. 게다가 그 때가 언제 적 얘긴데 그래. 10년도 더 전이잖아.”

 

  하나이는 욕조 뚜껑을 끌어와 덮은 채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아버지도 참, 애들이 어느 정도 컸으면 그런 건 주의를 시켜야 할 것 아냐. 여자 애들이니까 더! 그는 부루퉁한 표정으로 서운해 하며 욕실 문을 닫은 쌍둥이를 떠올렸다. 이성에는 적당한 거리를 두는 편이 나을 텐데 저렇게 거리낌이 없어서야. 현 시점에서는 나쁠 것도 없다지만 그렇다고 그다지 좋을 것도 없다. 쌍둥이가 가족에게만 그리 성별의 구분을 모호하게 무너뜨린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나이는 아버지에게 확실히 주의를 드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놀랐던 가슴을 진정시키며 다시 물속으로 턱까지 들어갔다. 쌍둥이가 말했던 입욕제를 풀어 넣자 무언가 긴장이 풀리고 머리가 개운해지는 향이 나기 시작했다. 몸으로는 당장의 효과가 올 리 없겠지만 이 정도만 되어도 충분히 만족스럽다. 그는 다시 몸을 완전히 녹이며 욕조에 몸을 기대었다. 그런데 그 평화를 오래 보아 넘기지를 못하는 건지, 다시 한 번 문이 벌컥 열렸다. 하나이는 한숨을 쉬며 문 쪽을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하루카, 아스카. 오빠가 씻을 때는 그렇게 자꾸 들어오는 게 아니라고…… 타, 타지마?!”

  “아, 네 동생이 같이 씻으라던데?”

  “쓸 데 없는 말을!”

 

  하나이는 욕조 속에서 최대한 몸을 둥글게 말며 고개를 무릎 위로 푹 수그렸다. 타지마는 거리낌 없이 욕실의 문턱을 넘어섰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은 알싸한 통증에 하나이는 얼른 수면을 내려다보았다. 심장이 숨길 수도 없을 만큼 강하고 빠르게 내달리고 있었다. 가릴 수조차 없어 들키는 건 시간문제겠다 싶을 정도로. 그런 하나이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타지마는 욕실의 문을 아주 잠가버렸다. 그 순간, 더할 나위 없이 끔찍한 묵직함을 맛본 하나이의 심장이 납덩이처럼 횡격막 위로 덜컥 내려앉았다. 이 좁은 욕실에서, 숨 막힐 것 같은 증기와 갑갑한 열기 속에서 갑자기 문을 잠가버리면…… 나는…….

  하나이는 스스로에 대한 공포심을 이기지 못해 토끼처럼 놀란 눈으로 타지마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타지마는 하나이 쪽으로는 별로 신경도 쓰지 않은 채 훌러덩 셔츠를 벗을 뿐이었다. 하나이는 당황스럽다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정말? 정말 같이 할 생각이야?! 하나이는 입 밖으로 차마 묻지 못하는 말을 혀끝으로 몇 번이고 굴렸다.

 

  실은 알고 있었다. 같은 성별의 또래 친구와 같이 목욕하는 건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일이었으니까. 문제는 그가 타지마를 같은 성별의 또래 친구, 라고만 보지 않는다는 것에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대놓고 얘기하며 불편하다, 나가라, 하고 이실직고할 수는 없었다. 그것을 숨겨야 하기 때문에 지금 이 상황이 더 불편한 것이었다.

 

  하나이는 불편한 기색이 묻은 눈으로 타지마를 응시했다. 하지만 타지마는 별 생각 없이 찬장 위로 셔츠를 던진 뒤 바지마저 휙 벗어던졌다. 그러다 문득 시선을 눈치 챈 건지 팬티 허리춤을 붙잡은 채 하나이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사색이 된 하나이와 눈을 마주쳐왔다. 하나이는 피할 수조차 없이 굳어버린 고개로 타지마를 응시했다. 여기서 피하는 건 바보 같다. 하지만 피하지 않을 수도 없다. 그런데 피하려고 해봐도 몸이 얼어붙어버려서 마음대로 움직이지를 않는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뜨거울 정도로 따뜻하게 몸을 감싸던 온기는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어딘가 꽉 막힌 기분이었다. 타지마는 하나이의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을 살피다 다시 욕실 문 쪽을 쳐다보았다. 저 딴에는 나름 하나이의 심리를 분석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윽고 천천히 입을 열어 대꾸했다.

 

  “아아. 아까 너랑 동생이 하는 소리 다 들렸거든.”

  “어, 응?”

  “나도 있는데 또 네 동생들이 문을 벌컥 열거나 하면 서로 곤란하잖아?”

 

  그건 그렇지. 하나이는 무의식중에 고개를 끄덕였다. 타지마는 씨익 웃으며 속옷마저 벗고 샤워기 앞에 다가섰다. 하나이는 고개를 푹 수그리며 물속으로 입까지 몸을 담갔다. 자꾸 움츠러들어 이러다 공벌레라도 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이는 블랙조크랍시고 스스로에게 중얼거리면서도 무릎을 끌어안고 허리를 굽혀 등을 둥글게 말고 있는 포즈를 절대 풀지 않았다. 그런데 그 순간 머리로 찬물이 쏟아졌다.

 

  “으힉?!”

  “아! 미안, 미안!”

 

  하나이는 파르르 떨며 목소리가 들린 쪽을 향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선의 끝에는 찬물이 나오는 샤워기를 붙잡은 채 자신을 쳐다보는 타지마가 있었다. 하나이는 대뜸 입을 벌렸다. 하지만 이 상황이 당황스럽기도, 알몸인 상태에서 눈이 마주친 데 대해 당혹스럽기도 해서 도무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다른 녀석들이었다면 분명 진작 샤워기 머리를 바로 두고 썼어야 되지 않았냐며 면박을 주거나 했을 텐데, 그 당연한 것조차도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정말 찬물을 얻어맞은 것처럼 완벽하게 머릿속이 백지가 되어버려서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욕조에 들어오기 위해 거품을 내서 몸을 간단히 씻는 타지마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무릎을 세게 껴안았다. 머리가 차가운 것이 영 기분이 나쁜데 그렇다고 무릎을 껴안고 있던 팔을 풀어내기는 싫었다. 몸이 어딘가 열리는 듯 풀어지는 느낌이 싫었다. 무엇보다도 겁이 났다. 하느님, 제발 타지마한테 고백하지 않게 해주세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하나이는 질끈 눈을 감고는 얼굴을 묻었다.

  욕조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물은 여전히 아까만큼 따뜻할 텐데 전혀 온기를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몸은 바짝바짝 긴장되기만 했다. 타지마의 샤워기 소리가 귀를 때리듯 좀먹어 들어왔다. 그것은 마치 맨 어깨 위로 차가운 것이 닿는 듯 어딘가 간지럽지만 소름 돋도록 아린 감각이었다. 하나이는 고개를 내저으며 무릎 위로 눈언저리를 비볐다. 그리고는 가능한 신경을 쓰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리고 어느 한 순간, 갑자기 물이 몸을 들어 올린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무겁게 넘쳐나더니 욕조 밖으로 흘러내렸다. 하나이는 귀를 때리는 지척의 소음과 몸이 붕 떴다가 다시 천천히 가라앉는 것 같은 무거운 감각에 저도 모르게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러자 아주 가까운 정면에 타지마의 얼굴이 보였다. 하나이는 기겁하며 욕조의 가장 뒷부분까지 물러났다.

 

  “으악!”

  “뭐야, 하나이. 내가 그렇게 싫어?”

  “그걸 말이라고 해?!”

 

  하나이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가 이내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베개가 뒤통수에 닿기만 하면 푹 잠들어버리는 하루카와 아스카는 이미 꿈나라를 여행 중일 터다. 소리를 질러 두 여동생의 잠을 깨우고 싶지는 않았다. 하나이는 자신과 무릎이 닿을 만큼 가까이에 마주앉은 타지마를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얼굴이 확 뜨거워지는 것만 같았다. 큰일이다. 하나이는 두 손으로 욕조의 물을 퍼 올려 얼굴에 마찰시키듯 끼얹어 세수했다. 안 그래도 언제 이 마음을 들켜버릴까 조마조마 불안해 죽을 것만 같은데 그렇게 대놓고 ‘내가 그렇게 싫어?’라는 말을 듣자 필요 이상으로 반응해버렸다. 친구끼리도 농담으로 주고받을 수 있는 평범한 말에조차 흠칫 놀라 아무 반응도 못하는 스스로가 한심하다. 하나이는 긴장으로 지쳐버린 몸을 다시 둥글게 말며 부루퉁하게 말했다.

 

  “좋고 싫고를 떠나 갑자기 눈앞에 얼굴을 들이대니까 놀라는 게 당연하지.”

 

  됐어. 이 정도면 잘 넘어간 거야. 하나이는 속으로 스스로를 격려했다. 타지마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쳇, 하고 혀를 찼지만 그 뿐이었다. 이 답변에 위화감은 없었던 모양이다. 하나이는 그제야 좀 더 제대로 안심하며 무릎을 좀 더 모아 끌어안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불현듯 아주 중요한 것을 이제서 깨달았다. 이렇게 웅크리고 앉아 타지마와의 접촉을 피한다는 것은, 자신이 타지마와의 입욕을 거절할 타이밍을 놓쳤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나이의 얼굴이 새하얗게 탈색되었다. 무슨 자신감으로 그와 한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는 건지 한심스럽기만 하다. 완전히 타지마의 페이스에 말려버린 셈이다. 그렇다 해도 타지마가 발을 밀어 넣고 몸을 담그기 전까지도 아무 생각도 못하다니. 스스로가 과민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최소한의 이성적 판단마저 제대로 못할 정도였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 가까이서 마주보고 있다는 사실에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어버리다니.

  그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이렇게 좁은 욕조 속에 무릎이 닿을 거리에 함께 앉아있다. 섬세하게 흔들리는 수면에 가슴의 맥동을 빼앗기진 않을까. 그것을 녀석에게 들켜버리지 않을까. 아니, 느껴지는 정도가 아니라 귀에 들릴 지도 모른다. 이 불안감이. 그는 조심스럽게 타지마의 눈치를 살폈다. 타지마는 두 손으로 물을 퍼 올려 자신의 머리 위로 몇 번이고 끼얹고 있었다.

 

  “숨 막혀. 이런 한여름 열대야에도 뜨거운 물로 목욕하는 거야?”

  “남이 뜨거운 물에 씻든, 찬물에 씻든. 안 그래도 피곤한데 찬물로 샤워해봐, 바로 감기 걸릴걸?”

  “그렇지만 덥잖아!”

  “그건 네가 가만히 있지를 않으니까 그렇잖아. 학교에서 하는 걸 보면 집에서도 똑같겠지?”

  “하지만 더운 건 더운 거야!”

 

  하나이는 투정을 부리는 타지마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싫을 것 같았다면 차라리 안 들어와도 됐을 텐데 굳이 좁은 욕조에 들어와 이 마음까지 완전히 어지럽혀 놓아가며 저렇게 심통을 부리는 꼴이 영 이해가 가지 않는다. 언제나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왜 지금은 그러질 못하고 저러는 거야.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지극히 타지마스러운-어린 애 같은- 모습에 도리어 긴장이 풀리고 몸이 자연스럽게 이완되며 다시 따뜻하게 덥혀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러니까 따뜻한 물로 씻는 거잖아. 하나이는 잊혀져가던 온기에 기댄 채 숨을 천천히 들이켜고 내쉬었다. 그러니까 너도—

  하나이는 부드럽게 녹아내린 몸을 움직여 타지마에게로 허리를 굽혔다. 무릎은 굽혔지만 다리를 벌린 채 욕조 벽에 푹 기대어있던 타지마는 갑자기 다가오는 하나이의 손길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나이는 놀란 듯 보이는 타지마의 눈에 작게 미소 짓고는 그대로 그 어깨를 잡아 욕조 안으로 좀 더 깊숙이 눌렀다.

 

  “뭐야, 하나이! 답답해!”

  “조금만 성질 좀 죽이고 가만히 있어봐.”

 

  부드럽게, 하지만 단호하게 딱 자르는 말을 수면 위로 흘려내고는 타지마의 어깨를 적당한 압력으로 지그시 내리눌렀다. 타지마는 목까지 잠긴 몸에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하나이의 말에 따르기 위해 노력했다. 목까지 잠기면 정말 숨이 막히는데. 타지마는 물기에 젖어 반짝이는 하나이의 어깨에 시선을 얹고는 생각했다. 몸을 이리저리 달싹여보지만 하나이는 손의 힘을 풀 생각이 없어보였다. 일단은 후보 투수일 정도니까 악력만큼은 어쩔 수 없나. 타지마는 최소한 답답하고 뜨거운 느낌만이라도 피하려고 이내 잡념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좋게 말하면 발상의 전환이 빠르고 나쁘게 말하면 무엇 하나를 지긋하게 참는 것을 정말 못 견디는 성격이었으니.

  타지마의 눈이 뒤룩뒤룩 시야를 헤집어가며 주변을 살핀다. 하지만 눈앞은 온통 하나이의 어깨나 하얀 가슴팍으로 꽉 차서 무엇 하나 제대로 다른 것을 보기에는 전망이 영 좋지를 못했다. 타지마는 흥밋거리를 찾는 것을 포기하고는 눈을 하릴없이 정면에 가져다두었다. 그러다 이내 하나이의 턱 선을 타고 목덜미로 미끄러지는 물방울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그제야 눈앞에 있는 상대를 온전히 눈에 담았다.

  온수로 인해 발갛게 달아오른 몸과 얼굴, 그보다 더 붉어진 채 반짝이는 입술, 색소가 옅은 눈망울은 일정 이상의 증기를 먹고 푸딩처럼 부드럽게 흔들렸다. 타지마는 녹아내릴 것 같이 부드러워진 하나이의 유려한 얼굴 곡선을 쭉 따라가며 눈을 깜빡였다. 그러는 사이 언제부터인가 목을 누르는 수압은 전혀 느껴지지 않게 되었다. 아니, 오히려 몸이 노곤하게 녹아내리는 느낌이…….

 

  “몸이 좀 풀리는 것 같지 않아?”

  “……확실히.”

 

  타지마는 깜짝 놀라 어깨마저 흠칫 떨며 대답했다. 그리고는 하나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가 자신에게 말을 걸기 위해 입술을 움직이는 순간 퍼뜩 탱글탱글한 푸딩이 떠올랐다. 아, 배고파. 갑자기 푸딩이 먹고 싶네. 타지마는 속으로 엄마가 만들어주는 우유 푸딩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셨다. 내일은 엄마한테 푸딩 만들어달라고 졸라야지. 하나이는 여전히 어딘가 얼빠진 타지마의 모습에 킬킬 웃으며 자신의 자리로 물러나 다시 무릎을 끌어안았다. 하지만 아까보다는 훨씬 긴장한 기색이 덜했다. 타지마는 몸은 물론이거니와 머릿속까지 노곤해진 채 하나이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리고는 사심 없이 말했다.

 

  “하나이는 만약 여자라면 정말 예뻤을 것 같아.”

  “무슨 소리야!”

  “정말. 여자애라면 지금 바로 고백했을 지도 몰라. 엄밀하게.”

  “헛소리 좀 그만해.”

 

  하나이는 인상을 팍 찌푸리며 타지마를 외면했다. 타지마는 정말인데, 하며 중얼거렸다. 그 말마저도 도무지 귓등으로 흘려지지가 않아 하나이는 얼른 욕조의 물로 가볍게 세수했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화가 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고, 비참하기도 하고, 그런데 기쁘기도 했다. 왜 난 남자로 태어난 거지? 타지마는 왜 여자애가 아닌 걸까. ‘남자’라는 것에 대해 특별히 불만 같은 것을 가져본 적도 없었는데. 오히려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는데. 하나이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리고는 간신히 웃음기를 얹어 대꾸했다.

 

  “만약 내가 여자라면 너랑 지금 이렇게 같이 목욕하고 있겠냐.”

  “아, 그건 그러네.”

 

  하나이는 금세 킬킬대며 웃어버리는 타지마를 따라 그대로 웃어버렸다. 아니, 자신도 타지마와 비슷하게 웃음을 지을 수 있었을 거라 생각했다.

 

 

 

  개운하게 덥혀진 몸이 에어컨의 서늘한 바람에 서서히 식어간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아서는 어느새 저도 모르게 꾸벅꾸벅 존다. 내일도 새벽부터 훈련, 그리고 수업, 다시 훈련의 빡빡한 일과가 기다리고 있다. 게다가 원래 씻으면 바로 푹 잠들어버리는 스타일이라 피곤한 와중에 이렇게 깨어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울 정도다. 하나이는 꾸벅꾸벅 졸다 말고 흠칫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신이 졸고 있다는 것을 그제서 불현듯 깨달은 듯싶었다. 그는 힐끔 타지마를 쳐다보았다. 타지마는 완전히 고개를 책 위로 파묻고 잠들어있었다. 하나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1분이라도 감시를 소홀히 하면 곤란한 녀석 앞에서 아예 졸아버렸으니 저 정도로 대놓고 잠들어버리는 건 당연했다. 그는 타지마의 팔을 가볍게 흔들었다. 하나이의 브이넥 셔츠를 입은 채 잠들어있던 타지마는 잠투정을 하듯 낮게 신음을 냈다.

 

  “일어나! 쪽지시험 빵점 맞고 싶어?”

  “으응…… 우으—”

  “그래, 그럼 자. 내일 기준 이하의 점수를 맞고 정규 시험에서까지 아슬아슬하다면 분명 낙제점을 맞을 테고, 그러면 시가뽀랑 모모캉이 출전금지 시키겠다. 그치? 그러면 가을 대회 라인업으로 아마 3루수 수비는 미즈타니가 하겠고, 4번 타자는 내가 하겠지. 시합에서 이겨도 너는 벤치 신세, 시합에서 지면 나인 전체가 너를 원망할 거야. 하지만 걱정하지 마. 미즈타니가 3루를 잘 잡고 내가 홈런을 때려준다면 네 공백 정도야—”

  “하나이, 공부하자. 엄밀하게.”

 

  하나이는 어딘가 불타는 것만 같은 타지마를 힐끗 살피고는 몰래 웃어버리고 말았다.

 

  미즈타니에게 아무리 3루를 잘 잡는 스피드와 센스가, 자신에게 홈런을 때릴 수 있는 선구안과 체격이 있다고 해도 타지마의 능력을 따라가기는 한참 역부족이다. 그라운드에 선 타지마는 그야말로 눈부실 정도로 반짝반짝 빛났으니까. 체력, 센스, 스피드를 비롯한 재능들뿐만이 아니었다. 재능을 더 빛나게 할 노력이 있었고, 노력을 뒷받침하고도 남을 정도로 야구를 좋아했다. 타지마에게는 언제나 후광이 비치는 것만 같아 홀리듯 쳐다본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의 미묘한 감정에 이르게 되리라곤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지만.

 

  하나이는 점점 생각의 방향이 이상한 데로 흐르기 시작하자 얼른 고개를 휘휘 저었다. 타지마는 완전히 떨쳐버릴 수는 없는 졸린 기색의 눈으로 하나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졸린 기색인 타지마를 보고 여전히 잠에서 아주 깨어나지 못하는 자신의 상태를 살폈다.

 

  “자꾸 잠이 와서 안 되겠다. 뭐라도 물고 있을까? 뭐 먹을래?”

 

  무엇이든 일단 좀 씹고 있어야 잠이 가시겠다 싶을 정도의 피로감이었다. 원래 이 시간이면 자야 하는데. 하나이는 시계를 쳐다보았다. 시침은 어느새 자정을 넘어서있었다. 그러고 보니 부모님이 늦으신다. 그는 아직도 기척이 없는 방 밖에 귀를 기울이며 생각했다. 그 와중에도 타지마는 가만히 하나이를 응시했다. 그리고는 멍하니 하나이의 얼굴 어딘가를 뚫어지게 쳐다보다 중얼거리듯, 하지만 분명하게 말했다.

 

  “—푸딩.”

 

  하나이는 타지마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타지마와 정면으로 눈을 마주쳤다. 대체 언제부터 저렇게 뚫어져라 자신을 쳐다본 걸까. 하나이는 은근슬쩍 시선을 피했다. 타지마의 시선에는 위화감이 있었다. 고개는 분명 이쪽인데, 눈도 이쪽을 보고 있는데 시선이 완전히 맞물리는 것 같지는 않은, 조금 묘한 느낌. 하나이는 자신의 속사정을 갈무리하며 다시 타지마를 쳐다보았다. 이번에는 시선이 묶여버리듯 완전히 맞물렸다. 미묘하게 엇나가는 것도 어딘가 불편하긴 하지만 역시 이렇게 맞물리는 게 더 어렵구나. 하나이는 다시 한 번 통감했다.

 

  “푸딩 먹고 싶어.”

  “그렇게 뭉글뭉글한 걸 먹으면 잠을 깰 수가 없잖아.”

  “뭐라도 물고 있자며. 자기가 말해놓고선.”

  “난 분명 잠 좀 떨쳐내려고 물고 있자고 한 거다. 응?”

  “치사해.”

  “됐다, 됐어. 어차피 거의 다 했으니까 금방 잘 텐데, 뭐. 책이나 봐.”

 

  타지마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서운한 기색을 드러낸다. 하지만 모르는 척 무시하기로 결정한 하나이의 눈은 마치 초탈한 듯 책 위로 가라앉았다. 그는 테이블 위로 몸을 가까이 기울이며 타지마의 책을 거꾸로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샤프펜슬로 어느 한 부분을 짚었다. 이쪽을 보라는 의미였다. 타지마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가만히 책 위에 시선을 내리깔았다.

 

 

 

  “오늘 가르쳐 준 걸 내일까지 기억만 하고 있어도 절대 기준 이하의 점수는 안 받아. 그러니까 까먹지 말고 똑바로 기억해.”

 

  하나이는 타지마의 책을 탁, 소리가 나도록 덮어주며 말했다. 타지마는 완전히 지쳐버렸다는 듯 실이 끊어진 마리오네트처럼 그대로 테이블 뒤로 드러누워 버렸다. 하나이는 기진맥진한 타지마의 머리 위로 손을 가져가다 이내 움찔 하며 허공에 멈춰 세우고는 어깨로 방향을 고쳤다. 방향이 미묘하게 엇나가 어깨에 안착한 손은 타지마의 몸을 부드럽게 흔들었다.

 

  “비켜봐, 테이블 치우고 이불 펴게.”

  “으응…….”

 

  타지마는 콧소리 비슷한 잠꼬대를 하며 그대로 비척비척 일어나 하나이의 침대로 향했다. 어이, 어이? 거긴 내가 잘 자린데? 하나이는 미간을 찌푸렸다. 혼자 치우고 알아서 제 잘 자리-물론 침대 밑에 이불을 까는 것-를 펴도 모자를 판에 뒤로 물러나 오히려 남의 침대에서 잠을 청하는 것이 황당하기만 하다. 하지만 언제는 타지마가 상식이 통하는 녀석이었던가. 체념 비슷한 생각으로 마음을 비워내고는 테이블을 치우고 장롱 문을 열었다. 외박 손님이 자주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혹시 몰라 이불 한 채 정도는 장롱에 넣어두었던 것이 이제서 나름 요긴하게 쓰일 모양이었다.

 

  “하나이, 뭐해?”

  “네 이불 펴려고.”

  “아아, 안 펴도 되는데.”

 

  그건 또 무슨 소리야. 하나이는 뒤를 돌아보았다. 침대 위에는 수마에 잡아먹혀 몸은커녕 눈꺼풀조차 건사하지 못하는 타지마가 반쯤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는 눈을 비비고는 좀 더 제대로 하나이를 보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몸조차도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잠에 취해있는데 눈이 금세 풀려버리고 다시 무겁게 닫혀가는 것은 어찌 보면 아주 당연했다. 으으, 하나이가 두 명…… 아니, 세 명으로 보여. 타지마는 작게 중얼거렸다. 하나이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정면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허리를 굽혀 이불의 밑 부분을 단단히 받쳐 쥐었다.

 

  “따로 안 펴도 된다니까.”

  “으앗!”

 

  목소리가 바로 한걸음 뒤까지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무언가가 어깨에 휙 매달린다. 그것은 갑작스럽기까지 한 데다 결코 견딜 수 있을 만한 무게가 아니었다. 하나이는 앞으로 몸을 고꾸라뜨리며 무릎을 꺾었다. 그러자 얼굴이 이불 위로 묻히고 몸이 그대로 미끄러져 내려와 완전히 이불에 매달린 채 무릎을 꿇고 있는 볼 성 사나운 꼬락서니가 되었다. 하나이는 이 무게에 대해 너무나도 확실히 알고 있었기에 확인조차 하지 않은 채 미간을 찌푸렸다.

 

  “타지마.”

  “필요 없다고 했잖아.”

  “그럼 맨바닥에서 잘 생각이야?”

  “아니, 침대에서 잘 생각인데.”

 

  목을 끌어안은 타지마의 팔을 풀고는 몸을 돌려 기가 막힌다는 듯 그를 마주본다. 그는 여전히 졸린 기색이 역력한 눈으로 하나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렇게 졸음이 덕지덕지 붙은 눈에조차도 당연한 것을 왜 묻는 건지 모르겠다는 의미가 딱 드러나 보인다. 이쯤 되니 황당하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하나이는 놀라울 정도로 매끄러운 목소리로 평정을 가장하며 되물었다.

 

  “그럼 방주인인 내가 맨바닥에서 자라는 거냐?”

  “에엑, 하나이. 농담하는 거야?”

  “농담은 네가 하고 있잖아.”

  “난 농담 안 했는데.”

 

  다람쥐가 된 기분이다. 대화는 쳇바퀴를 굴리듯 도무지 한 걸음의 진전조차 없다. 이불은 펴지 마라. 자긴 바닥에서 안 잘 거다. 그게 무슨 뜻이라는 건데. 하나이는 다시 세로 주름이 내려앉는 미간을 가로로 늘여 펴듯 눈썹 언저리에 손을 갖다 붙이고는 눈 위로 작게 그늘을 만들어 가렸다. 타지마와 대화하고 있자면 익숙해질 듯 보이다가도 금세 지치고 피곤해지고 만다. 이렇게. 그는 다시 한 번 인내심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빨리 얘기가 끝나지 않으면 타지마는 지금 이 상태 그대로 잠들어버릴 수도 있었다. 그건 절대 곤란하다.

 

  “타지마, 스무고개 하는 거 아니야.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분명히 해.”

  “…….”

  “타지마—!”

  “응?! 응, 아아…….”

 

  역시. 이대로 이쪽에 몸을 기대고 앉은 채로 완전히 잠들 뻔한 거다. 하나이는 자신에게 푹 기대어 있는 타지마를 떨어뜨려놓고는 다시 한 번 방금 전의 말을 반복해서 말했다. 하지만 타지마의 표정은 영 귀찮다는 듯 살짝 미간을 일그러뜨린 채였다. 지금 귀찮은 쪽이 누군데 그래. 하나이는 뒷목이 뻐근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때, 타지마가 잠꼬대를 하듯 웅얼거렸다.

 

  “같이 자면 되잖아.”

 

 

저도 저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이런 절단신공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