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국 이야기

※시점은 내맘대로 옮겨타고, 커플링도 어디 한 군데 존재하지 않습니다(그나마 있다면 경주종인가...-_-)

※경왕의 실도 이야기입니다

 

*참고-시큐리티 블랭킷(안심담요)

미국 만화 「피너츠」에 등장하는 라이너스 반 펠트는 성서 내용을 모조리 외는 신동이지만, 「시큐리티 블랭킷(안심담요)」이라는 낡은 담요를 지니고 있지 않으면 불안해서 어쩔 줄 모르게 되는 「불안증후군」을 앓고 있다.

여기서 뭔가를 손에서 놓지 않거나, 그게 없으면 불안해지는 심리상태를 「라이너스의 담요」라고 부른다.


 

 

 

세계의 동쪽 끝에 있는 경동국. 마치 바짝 잡아당긴 활시위처럼 생긴 경국의 수도 영주의 한 가운데에 위치한 요천. 구름을 뚫고 오른 요천산의 꼭대기에는 경의 중심이 있었다. 금빛 물결이 퍼지듯 아름다운 궁궐, 금파궁은 운해 너머의 백성들을 향해 금빛 물결을 전했다. 왕궁에서부터 전해오는 금빛 물결을 얻은 경은 풍요로웠다. 수확의 시기를 맞아 논밭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제방도, 치수도, 치안도, 복지도 부족함이 없었다. 조부모께 아주 어렸을 적 들은 바에 따르면 현왕께서는 태과이시다. 봉래는 이렇게나 풍요로웠던 것일까. 실제로 왕이 선포한 초칙과 그 후 반포된 새로운 법들은 12국 중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파격적인 것들이 많았다. 자기 한 사람의 몫만 충분히 해낸다면 그 출신이 어떻든 간에 평생 먹을 것, 입을 것, 살 곳의 걱정 없이 풍요로운 일생을 보낼 수가 있었다. 벌써 600년을 넘어가는 안주국도, 700년을 넘어가는 주남국도 부럽지 않았다. 백성들은 이따금 하늘을 우러르며 여왕의 치세를 찬양했다. 경의 백성은 행복했다. 벌써 왕의 치세는 백년을 넘어서려 하고 있었다.

조용하고 평온하게 어제와 같이 오늘을 흘려보내는 하계와는 달리 운해 위 금파궁은 소란스러웠다. 제관들은 관복이 스치는 소리가 날 정도로 빠른 발걸음으로 움직였고, 하관들은 그보다 더 바쁘게 움직였다. 금문으로는 각 주에서 주후들이 속속들이 입궁하고 있었다. 현왕의 치세 이래 이처럼 소란스러운 날은 없었다. 바쁘게 움직이는 모두의 입에는 웃음이 걸려있었다. 모두 행복한 얼굴로 인사를 주고받고, 들뜬 걸음을 더욱 바삐 서둘렀다. 오늘은 왕의 치세가 100년에 이르는 날의 사흘 전이었다.

본래 왕의 치세가 100년째에 다다른다 해서 이런 성대한 연회를 준비하지는 않는다. 모두가 왕을 찬미하고 기뻐하기는 하지만 제관들이 사비를 털어 모아 이런 연회를 준비하지 않는다. 그렇다. 이 연회는 국고가 아닌 제관들의 주머니에서 나온 사비를 모아 준비되는 것이었다. 물론 왕은 새삼스러울 뿐이고, 연회를 열 바에야 백성에게 조금이라도 더 많이 베풀 것을 부탁하며 완곡히 거절했지만 관리들은 입을 모아 이 기쁨을 누리게 해달라며 간청했다. 그를 뿌리칠 구실이 없는 왕은 어쩔 수 없었다. 정 그리 하시다면야 좋으실 대로. 왕은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았지만 대신들은 어떻게든 왕을 칭송하며 현 왕조를 누릴 수 있는 것을 기뻐하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운해 아래의 세상에서는 이미 전제인 여왕의 시대를 보낸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손가락에 꼽을 정도는 존재할 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전제도, 그 전제도 짧은 치세를 겨우 누린 여왕이었다. 몇 년 안 되는 재위기간을 겨우 채웠지만 그마저도 끝자락에는 실도로 이어졌고, 경의 기린 케이키는 왕을 찾지 못해 나라는 벼랑 끝에 몰렸다. 게다가 위왕마저 일어나 속속들이 제후성이 함락되는 등 나라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나라는 탐관오리에 의해 비도로 끌려갔고, 국고 역시 갉아 먹히듯 비어 갔다. 뜻이 있는 자는 탐관오리에 의해 숙청당하고, 그마저도 기린이 봉래에서 찾아온 왕은 또 여왕이었다. <또>. 그것은 조정에 대한 기대를 짓뭉갤 정도로 갑갑한 사실이었고, 실제로 새로운 여왕은 국정에 대해, 심지어는 이 세계의 상식조차도 아무 것도 몰랐다. 하지만. 하지만 왕께서는 이만큼이나 해내셨다. 탐관오리를 실각시키고 유능한 관리를 등용시켰으며 파격적인 초칙 이래 신분의 차별과 교육의 좁은 폭을 부수어버렸다. 나라는 요천을 중심으로 마치 물결이 조용히 퍼지듯 희망과 웃음을 전하며 풍요를 거듭해갔고, 파격적인 안들이 다듬어져 선포됨에 따라 나라는 주변의 11국과는 전혀 다른, 하지만 더 나은 방향으로 착실히 전진해갔다. 헐벗은 산야는 푸르러졌고, 백성은 자국을 찾아 돌아왔다. 유리창이 끼워진 집 안에서는 웃음이 쏟아져 나왔고 논밭은 훌륭한 결실을 일구어내었다. 운해 위에 사는 사람들은 전제의 악몽 속에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확실히 스스로가 겪어낸 기억으로서 알고 있었다. 그러니 도무지 기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밝고 따뜻한 기류는 왕에게 가까이 올라가면 갈수록 암울하고 탁해져만 갔다.

 

코우칸은 어깨를 늘어뜨린 채 자신의 거처로 돌아왔다. 창에 비친 자신의 관복을 입은 모습에 그는 자조하며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관복을 벗어 가지런히 개켜두며 그는 집무 책상에 앉았다. 그는 막 알현을 거절당하고 거처에 돌아온 참이었다.

한 10여년 쯤 되었다. 왕은 정무에 흥미를 잃으셨다. 항상 먼저 신료들과 함께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거의 경쟁을 벌이듯 백성을 아끼고 정무를 성실 이상의 성실로 돌보았다. 하지만 그랬던 왕은 정무에, 아니, 끝을 맺어야 했을 자신의 생에 흥미를 잃으셨다. 물론 주남국의 700년이나 안주국의 600년, 범서국의 400년, 공주국의 190년에 비하면 더없이 짧은 치세이나, 50년도 넘지 못하고 단명한 왕이 넘치는 이 열두 나라에서 그녀는 초반의 불안함을 극복하고 잘 해내 주었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코우칸은 10여년 쯤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마치 제집 드나들듯 금파궁에 내방한 연왕은 주상을 기다리는 동안 자신에게 물었다.

 

「요코, 아니, 경왕께서는 몇 년 정도 치세를 누렸나. 나이를 먹으니 영 기억이 가물가물하군.」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요. 저희 역시 세어보지 않는 한 기억하지 못합니다. 운해 아래 사람들에게 있어 이미 수명을 뛰어넘는 세월입니다.」

「하하핫, 타국의 왕을 위로하는 건가.」

「감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일국의 신하된 자로서, 왕의 귀중함을 알고 있을 뿐입니다.」

「하쿠타쿠가 좋아하겠군. 그래서, 경왕의 치세는?」

「90여년에 이릅니다. 곧 100년을 앞두고 있군요.」

 

벌써 그리 되었나, 하며 턱을 쓰는 그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다. 코우칸은 의아한 눈으로 연왕을 응시했다. 그는 심경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연왕에게 조력을 요청하던 주상의 풋내 나는 과거를 떠올리며 지나가버린 시간에 대한 안타까움과 허무함을 떠올리는 것일까. 코우칸은 다만 아무 말도 없이 연왕의 맞은편에 서 있었다. 주상은 아직 오후의 정무가 미처 정리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연왕은 주상에게 있어 내빈이라기보다는 마치 이웃 사는 친우 내지는 가족 같이 허물없는 사이였다. 연왕 역시 주상을 그리 생각해주시는 듯 했다. 그래서인지 두 왕은 자주 왕래가 있었다. 심심찮은 소문마저 돌 정도로. 그래서 주상께서는 빈객의 내방에 소란을 피우지 않고 자신의 집무를 마저 마치는 것이었다. 연왕이 방문할 때마다 정무를 미루고 나온다면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턱이 없다. 그 정도로 잦은 방문이었다. 코우칸은 조심스럽게 안국의 왕에게 물었다.

 

「황공하옵니다만, 연왕께서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실는지 소신이 감히 여쭈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원래 이런 것을 먼저 묻는 것은 명백한 실례에 무례다. 하지만 경과 안 사이에는 기묘할 정도로 벽이 낮았다.

 

「왕에게는 고비가 있다.」

「네?」

「들어.」

 

연왕은 짧게 말했다.

 

「첫 고비는 재위 후 십여 년 사이. 전제가 무너뜨리고 옥좌를 비운 나라의 혼란스러움을 정리할 때. 요코는 그걸 아주 좋은 기세와 방향으로 이끌어냈지. 두 번째 고비는 바로 이 때다. 인간이었다면 이미 종지부를 찍었을 시기.」

 

연왕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코우칸은 연왕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단번에 꿰뚫었다. 코우칸은 예의바르게 무릎 위로 모은 두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을 주었다. 연왕이 한 말은 분명 타국에 있어 실례될 수도 있는 큰 파장을 불러올 말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수많은 왕조의 죽음을 보아하면 언제나 재위를 넘기지 못한 때, 그리고 왕의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수명의 종지부를 찍어야 했을 때. 대개의 경우 그 근처에서 끊어졌다. 주, 안, 범, 공은 그것을 훌륭히 이겨낸 몇 안 되는 나라일 뿐이었다. 연왕은 600년의 치세를 누렸다. 수많은 왕조의 흥망성쇠를 지켜봐왔다. 연왕은 잔에 담긴 식어가는 차를 단숨에 들이키고는 바깥의 정원을 내다보았다. 코우칸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연왕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실례된다는 것을 미처 깨달을 새도 없었다. 나의 주군에게만큼은 그 시기가 없기를 바라고, 있더라도 슬기롭게 지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아니, 저렇게나 성실하고 훌륭한 주인이 인간으로서의 굴레를 벗어내지 못해 허우적거리며 나락으로 빠져들 리 없다. 코우칸은 연왕의 말을 믿지 않으면서도 내심 무섭도록 가슴이 뛰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연왕은 마침 조금 피로한 얼굴인 채 웃으며 들어오는 붉은 머리 소녀를 반가이 맞았다.

 

「요코, 너만은 그 시기를 무사히 뛰어넘길 바라.」

 

요코는 들어오자마자 건네는 연왕의 뜬금없는 한 마디에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재보와 함께 가까이 다가오며 연왕과 가벼운 안부 인사를 했다. 하지만 코우칸의 눈에는 분명히 보였다. 그 순간 그녀는 한 층 더 지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이 왜 이제야 보인 것인가. 코우칸의 가슴은 마치 쇠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둔통을 호소하며 크게 울렸다.

코우칸은 그 이후 왕을 주시했다. 실도할 것이라고는 전혀 믿고 싶지 않다. 훌륭하게 100여년의 치세를 견뎌온 왕께 무언가의 이변이 일어난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 하지만 전제, 여왕과 위왕 죠에이의 난으로부터 겪은 절망은 아직도 살갗에 새겨져 있다. 왕은 점점 지쳐갔고, 어느 날은 재보에게 붙어있고자 하는가 하면 또 어느 날은 조의에서조차도 보려 하지 않았다. 궁 안 사람들은 단지 왕의 변덕이려니, 하며 넘어갔다. 코우칸 또한 ‘그 때’에 느꼈던 이변을 경험하지 못했더라면 결코 왕이 흔들리고 있음을 염두 해두지 못했을 것이다. 왕은 파격적이지만 고지식하여 궤도만을 걸어왔다. 이런 미심쩍은 변덕을 부리더라도, 왕은 조의에 꾸준히 참여하며 선정을 베풀었다. 정치에 한해서만은 위화감 같은 것은 느낄 수 없었으니 모두가 아무 문제도 없다고, 그렇게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코우칸은 텅 빈 듯 초점 없는 눈으로 관복을 쳐다보았다. 마치 잉크가 물에 퍼지듯 비어있는 눈에 복잡한 것이 어렸다. 100여 년 전 맑은 초록색 눈으로 당당하게 자신을 총재에 임명하던 왕을 회상해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외견이지만, 그 때에는 겨우 갖추어지기 시작한 왕의 패기가 스스로도 어색하다고 느끼는 듯 보이는 말투와 행동을 보이셨다. 하지만 경국에 희망을 여는 당당한 목소리와 자태셨다. 코우칸은 눈을 감았다. 왕이시여.

 

코우칸은 다음날도 조의가 마친 후 바로 정전에 들었다. 코우칸은 솔직히 오늘도 문전박대 당할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우러러 본 그녀는 재보를 멀리 두고 단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 죽 끓듯 심한 변덕의 날들 중 오늘은 유독 더 심각했다. 문 앞에 무릎을 꿇고 애원을 해서라도 배알을 해야겠다는 일념 하에 정침에 발을 디뎠다. 왕께서 쓰시는 집무실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가슴이 소란을 피워서 코우칸은 얼굴을 바짝 굳혔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것이 비단 자신의 가슴에서 오는 소란뿐만이 아님을 깨달았다. 마치 끓어 넘치듯 높게 지르는 소리. 소녀의 테를 그대로 간직한 왕의 목소리였다. 코우칸은 걸음을 서둘렀다. 주위를 물린 듯 주변에는 여관이나 심지어는 해조차도 없었다. 코우칸은 닫히다 만 듯 조금 벌어져있는 틈으로 안을 쳐다보았다. 당실 안으로 왕과 재보의 모습이 보였다. 코우칸은 들어갈지 말지 망설이다 상황을 보고 결정하기로 했다. 그 와중에도 왕은 마치 비명 같은 소리를 토해내고 있었다.

 

「주, 주상…….」

「그렇잖아. 나는 인간이 아니야. 그런 내가 어떻게 인간을 위한 정치를 할 수 있겠어?」

「주상께서는 지금까지 충분히 선정을 베풀어 오셨습니다.」

「인간이라고 착각하고 있었으니까. 인간인 나 자신에게 물어 헤쳐 온, 인간으로서의 내가 해 온 일이니까. 하지만 난 더 이상 인간이 아니야! 그걸 깨닫고 있어! 하계에서 나와 동시대를 보낸 사람들은 이미 다 죽어버렸겠지? 인간으로서의 나를 기억해주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어! 인간이 아닌 내가 어떻게 인간을 이해하고 그들을 위한 정치를 할 수 있다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

 

코우칸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도를 행하는데 인간이고 그렇지 않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태강이 언제나 옳아? 세상을 만들어낸 천제께서 정하신 태강조차도 정도에 합당하다고는 할 수 없어! 하물며 난 겨우 신적 끄트머리에 올랐을 뿐이야. 천제께서도 하시는 실수를 일개 말단 신 나부랭이인 내가 하지 않으리란 보장 있어? 나는 옥경에 계신 신들에 비하면 한없이 낮은데다가 불행인지 다행인지 백성과 가장 가까워. 그렇다는 건 내 생각이나 정책은 천제보다도 더 빠르게 백성에게 전달될 수도 있다는 것, 비틀어 말하자면 내 실수는 천제보다도 더 심하게 백성을 벼랑 끝으로 몰아갈 수도 있다는 거야. 완벽한 신도 아닌데, 게다가 인간도 아니니 더 이상 인간의 마음조차도 이해할 수 없어. 인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다는 건 곧 무슨 뜻인 지 알아, 케이키? 신의 탈을 뒤집어쓴 요마가 될 수도 있다는 거야! 진짜 요마라면 사람들이 위협을 느끼고 피하기라도 하겠지? 하지만 난 내 그릇된 언행 하나로 사람들을 요마보다도 더 확실히 죽여 없앨 수도 있어!! 저 낡은 의자에 앉은 채 말 한마디로, 손가락 하나로 죽일 거라고. 백성은 자신이 요마가 군림하는 나라에 산다는 것을 모른 채 죽어갈 거야. 잔혹하게.」

「주상, 당치도 않은 말씀을!」

 

요코는 무섭도록 싸늘한 웃음을 지었다. 그 자리에 있는 누구든, 그런 얼굴을 보는 것은 난생 처음이었다. 아마 본인조차도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은 난생 처음일 것이었다.

 

「천제 얘기가 나왔기에 하는 말인데, 왜 그 분은 멋대로 왕을 정하고 생명을 빼앗는 거지?」

「주, 주상!」

「원치도 않는 옥좌를 강요하며 사람을 죽였어. 그게 과연 천제께서 말씀하시는 인도인가?」

「주상!」

「나는 옥좌를 짊어질 그릇이 아니었어.」

「어찌 그런 말씀을!」

「나를 억지로 죽여 신이 되기를 강요했어! 그게 바로 백성의 목숨을 가벼이 여기지 말라는 천제의 뜻인가?!!」

 

코우칸은 이를 악 물었다. 왕은 천제를 원망하고 자신과 백성을 측은히 여겼다. 이제야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실감한 왕의 분노는 가실 수 없었다. 아니, 그것이 어떻건 간에 일단은 왕을 말려야 했다. 하지만. 문을 밀어내려 팔을 들었지만 소매 아래로 드러난 손이 눈에 띄도록 덜덜 떨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들어갈 수 없었다. 들어갈 용기가 없었다. 왕을 위로할 지, 아니면 간언할 지, 그조차도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왕은 인간으로서의 수명을 태워 신적에 오른 자. 애초에 목숨을 버리겠다는 각오가 아닌 한 신적을 반납할 수 없다. 선적을 반납하면 무거운 짐을 벗어내고 평범한 백성으로 돌아갈 수 있는 자신이 과연 왕에게 어떤 도리를 강요할 수 있다는 것인가. 코우칸은 숨조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케이키.」

「…….」

「봉래에서 너와 계약할 때. 실은 허락한다고 말하는 순간 몸의 안쪽 깊은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폭발해버리는 것 같았어. 그대로 내 자신이 형체도 없이 사라질 것같이.」

「…….」

「그건. 내가 신적에 들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인간으로서의 내 생명이 강제로 꺼뜨려졌기 때문이었겠지?」

「그런……!」

「……과연. 인간으로서의 나를 죽인 건, 바로 너였구나.」

「주…상…….」

「그래, 바로 너였어. 나를 그렇게 죽이고서! 가증스럽게도!!」

「주, 주상!」

「나가, 더 이상 너와 하고 싶은 말은 단 한마디도 없어.」

「주상!」

「나가! 난 분명히 나가라고 했어! 나가, 나가라고!!」

 

거의 악을 지르듯 귀를 찢으며 갈라지는 외침에 코우칸은 찬물을 얻어맞은 듯 흠칫 놀라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왜 몸을 숨긴 것인지는 스스로조차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재보에게 자신이 줄곧 듣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은 피부로 알고 있었다. 곧 천 자락이 스치는 작은 소리와 함께 호리호리한 장신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코우칸은 순간 지나가는 그 안타깝게 쳐진 어깨 위로 슬픔을 한가득 머금은 기린의 얼굴을 보고야말았다. 벼랑 끝에 선 듯 아슬아슬하고 안타까운 그 뒷모습에 코우칸은 차마 더는 볼 수 없어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이제 경은 어찌 되려는가.

 

§

 

왕은 즉위 100주년을 기념하여 제관들이 여는 연회에 화답하기 위해 거의 처음이다 싶을 정도로 화려한 옷차림을 한 채 정전에 들었다. 화려한 붉은 머리카락과 짙은 초록빛 눈이 그에 못지않게 화사한 의상과 장신구를 만나 더없이 빛났다. 왕은 미안함이 담긴 웃음을 지으며 제관들의 노고에 치하하고 자신의 치세의 영원을 빌며 축하하는 그들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하지만 곁에 선 재보의 표정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코우칸 역시 밝지만은 않은 표정으로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한밤중이 되어서야 연회가 파하고, 주후들은 한시라도 바삐 자신의 주성으로 돌아가기 위해 기수를 바삐 움직였다. 제관들은 내성과 외성에서 다시 한 번 이 날을 축하할 것을 약조하며 정전을 벗어났고, 코우칸은 앞서 자리를 벗어난 왕의 정침을 향했다. 변덕이 죽 끓듯 하던 왕이었다. 오늘은 재보가 곁에 없으면 불안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역시나. 정침에 가자 왕의 목소리가 코우칸의 귀를 자극했다.

 

「케이키, 정말 그건 내가 실언한 거야, 미안해. 용서해줘.」

「감히 용서라니요. 그런 말씀 마십시오.」

「아니야, 내가 정말 잘못했어. 그러니까 내 곁을 떠나지 마, 응?」

「……주상의 인간으로서의 목숨을 빼앗는 대가로 저는 언제나 어전을 떠나지 않을 것을 서약 드렸습니다. 결코 곁을 비우는 일은 없습니다.」

「아니야, 저번에 내가 한 말은 전부 잊어줘. 케이키를 상처 주다니, 내가 어떻게 됐었나봐. 그건 케이키의 뜻이 아니었잖아!」

「주상…….」

「제발, 제발 떠나지 말아줘, 부탁이야. 아니, 칙명이야! 절대, 절대 떠나지 마! 나, 잘할 테니까! 절대 백성을 나 몰라라 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너도 날 버리지 마……!! 제발, 부탁이야.」

 

무언가에 파묻힌 듯 소리가 둔탁하다. 열린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자 왕은 재보의 옷이 구겨질 정도로 꼭 껴안고 있었다. 짙은 한숨을 쉬며 슬픈 눈을 한 재보는 그대로 속눈썹을 늘어뜨렸다. 마치 왕은 재보에게 바짝 매달린 것 같았다. 두려움에 떠는 목소리로 재보에게 매달린 열여섯 소녀의 모습 그대로인 왕에게서 코우칸은 느꼈다. 왕은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죽인 케이키를 원망하면서도, 영원할 것만 같은 자신의 수명의 비참한 말로를 붙잡고 있는 것도 케이키라는 것을 알고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니, 그녀의 목숨을 위협하는 것은 케이키가 아니라 실도다. 요코는 의무적으로나마 정사만큼은 어떻게든 유지시키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녀 스스로의 고뇌는 실도에 이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기린을 통해 언젠가는 드러날 실도를, 자신의 과오를, 자신이 짊어진 생명의 무게와 더불어 한때나마 인간이었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자신의 목숨에 대한 욕망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왕은 자신의 심장을 틀어쥐고 있는 것이 재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재보가 증오스럽고, 무서워 견딜 수 없었고, 꼴도 보기 싫었지만, 곁에 두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혼란스럽게 흔들리는 눈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물을 담으며 재보의 옷깃을 붙잡고 오열하기 시작한 왕에게 코우칸은 다가설 수 없었다. 어느 때보다도 바스러질 것 같이 연약한 모습인 왕과 안타깝도록 어그러져있는 재보를 보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은 뻑뻑하고 무거운 눈을 감으며 침통하게 돌아섰다.

 

§

 

그로부터도 수십 년이 흘렀다. 시간의 흐름을 잃은 운해 위 세계에서의 몇 년은 마치 아차 하는 순간에 필적할 정도로 짧았다. 하지만 코우칸 이하 삼공에게만큼은 그보다 긴 시간은 없었다. 그들은 왕의 오열과 분노, 증오와 애증, 백성에 대한 측은지심과 모순적인 원망, 재보의 한숨과 쓴 웃음, 슬픔과 안타까움, 주인과 백성에 대한 측은지심, 심지어는 눈물마저도 끊임없이 보아왔다. 마치 영겁의 시간 같았다. 운해 위의 따뜻한 봄 날씨가 이리도 숨이 턱턱 막히는 것인지를 깨닫기를 수십, 수백, 수천 번. 그러나 신기하게도 아직 재보는 멀쩡했다. 실도의 병 따위의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당연할 지도 몰랐다. 왕은 자기 자신을 어그러뜨리면서도 나라만큼은 어떻게든 지켜나갔다. 언제나 자신의 뱃속에서 꾸물거리는 것을 조의에서만큼은, 백관제후들 앞에서만큼은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지금의 그녀 자신이라면 절대 인정하지 않겠지만, 과연 왕의 그릇이었다. 코우칸은 매 조의를 무사히 마칠 때마다 생각했다. 그것이 설령 의무감을 어떻게든 지고 가는 연약하고 가련한 왕이라 해도. 그리고 어느 날. 왕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조차도 괴로워 십여 년 쯤 전부터 정침으로의 발길을 끊었던 코우칸은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왕에게서 대면을 명받았다.

 

「주상 전하, 찾으셨……습니까.」

「응, 거기 앉도록 해.」

 

오랜만에 가까이서 배알한 왕은 부서질 듯 가냘파보였고 짙고 선명한 초록빛 눈에는 깊이가 생겨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건강하다기보다는 여위었다 싶을 정도로 마른 손으로 자리를 권하는 왕에게 예를 취하며 그녀가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코우칸은 그 후 조금 놀란 눈으로 자신의 옆을 보았다. 왕께 말씀을 올리다가 멈칫한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당실에는 태사인 엔호가 이미 곁에 앉아있었다. 왕은 잠시 눈을 감았다. 단지 눈을 감는 것뿐인데도 깊이 빨려 들어갈 만치의 깊이에 코우칸은 바짝 긴장했다. 그것은 마치 구덩이나 동굴과도 비슷했다. 감히 가늠할 수도 없는 어둠이 내려앉은, 까마득해져 순간 멍해질 정도로 깊은 것이 왕에게 있었다.

 

「나는 나름대로 꽤나 잘 숨겨왔다고 생각했지만, 두 사람만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해.」

 

코우칸은 시선을 낮추며 엔호를 쳐다보았다. 엔호는 작고 낮지만 깊은 한숨을 가느다랗게 흘리며 긍정했다. 코우칸도 엔호를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왕께서 모르신다는 것이 이상한 것이다. 여느 때와 같은 조정에서 오직 자신과 삼공만이 불안에 떨며 왕의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지? 나는 천의를 의심한다. 인간이 남아있지만 더 이상 인간이 아닌 나를 의심하고, 천의를 담은 케이키를 의심한다. 그럭저럭 어떻게든 수십 년을 버텨왔지만, 한계는 언제 올지 몰라. 나는 가능한 한 버텨냈다. 애초에 내가 이깟 옥좌를 받아들인 것은 나 같은 사람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야. 의식주, 그 어느 것도 보장받지 못한 채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스스로 포기할 수밖에 없는, 당연한 것조차도 사치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게 하는, 그래서 인간을 인간 이하의 피폐로 몰아내는 것을 견딜 수 없어서. 하지만 나는 이제 한계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주상!」

「입에 발린 말이 듣고 싶은 것도 아니고, 기분 좋은 말이 듣고 싶은 것도 아니고, 자비 넘치는 일시적 위안을 듣고 싶은 것도 아니야. 그러니까 들어. 그리고 대답해줘. 기린인 케이키처럼 자비와 정에 휩쓸리지 말고, 나라의 중추를 움직이는 관리로서, 세키시가 아닌 왕에게 진언해. 단 한 번뿐인 기회고, 난 아마 두 번 다시 묻지 않을 거니까.」

「……하문하시지요.」

 

엔호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왕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왕은 이번에 코우칸을 쳐다보았다. 그는 어렴풋이 왕께서 하시려는 질문이 어떤 것인지를 살갗으로 느끼고 있었다. 들을 자신도 없고, 듣는다 해서 정에 휩쓸리지 않을 리 없다. 이런 강견함을 품은 채, 이대로 치세를 누릴 수는 없는 것인가. 지난 100여 년 간 훌륭했던 왕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치고 머리는 아득해진다. 과연 그녀의 질문에 태사는 어찌 대답할 것인가. 또한 정에 휩쓸려 이대로 치세를 누리기를 진언 드렸을 때, 아슬아슬하게나마 유지되던 국정이 비도를 향해 달린다면? 백성은? 또한 그것을 누구보다도 슬퍼하며 모든 것을 원망할 왕은? 재보는? 그리고 어긋나버린 천명은? 코우칸은 왕의 대답을 요구하는 눈에 차마 바라는 것을 드릴 수 없었다. 코우칸은 절망적으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겨우 목을 비틀어 짜내 대답했다. 긍정의 대답을. 코우칸은 이미 그 순간, 여왕에게도 차마 겨누지 못했던 칼을 현왕에게 겨눌 각오를 했다. 코우칸은 왕을 선택했고,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칠 것을 마음 깊이 서약했다. 그 마음만은 기린에게도 질 수 없었다. 백성을 아끼고 왕을 경애했다. 훌륭한 치세를 누린 왕의 곁을 전심전력으로 보좌하며 한없는 신뢰를 받았다. 왕은 스스로가 무너져가면서도 백성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코우칸은 그녀의 끝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비록 언젠가 왕의 목을 칠 극악무도한 대죄인이 되더라도.

 

「나의 천명은 다했다. 워낙에 바쁘신 하늘은 케이키를 통해 그것을 보이지 않았지만, 나 스스로는 잘 알고 있어. 난 천의를 상실했고, 천명을 잃었다. 케이키가 나의 실도로 대신 고통을 받는 것은 수십 년 후가 될 지도 모르지만 당장 오늘 밤이 될 지도 몰라. 이미 두 번의 우왕을 택한 케이키와 그가 택한 마지막 우왕이 될 나는 그만 여기서 물러남이 옳지 않겠는가.」

「기린을 잃으면 봉산 사신목에 다음 대의 경과가 열려 왕을 선정하기까지의 기한동안 백성은 공위의 땅에서 살아야만 합니다.」

 

엔호는 조용히 대답했다. 감정은 전혀 실려 있지 않았다. 더 이상의 아무 것도 담겨있지 않은 목소리였다. 코우칸은 입을 다문 채 열지 않았다. 왕은 입술만을 끌어올려 웃었다.

 

「물론 다음 왕이 설 때까지 나 나름의 대비는 하고 마침표를 찍겠지만, 역시 공위가 길어지는 것은 좋지 않지. 그렇다면 케이키를 남겨두고 나는 양위를 하겠다. 그것은 어떠한가.」

 

엔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무겁게 침묵을 지켰을 뿐이었다. 코우칸은 엔호를 쳐다보았다. 엔호는 자신의 앞으로 놓인 찻잔에서 피어난 꽃만을 응시했다. 왕은 침묵을 용서하듯 내리깐 눈으로 어새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엔호 대신 코우칸을 쳐다보았다. 대답이 없다면 긍정으로 보아도 좋은가. 그녀의 눈이 코우칸에게 묻고 있었다. 붉은 연지를 바른 입술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는데도 그 눈짓은 소리를 갖고 있었다. 코우칸은 최후의 최후까지도 남아있던 망설임을 일갈에 물리며 대답했다.

 

「황공하옵니다만, 주상.」

「어떤 말을 해도 좋으니 편히 말하게.」

「주상은 저를 청하셨고, 저는 그에 응했습니다. 제가 주상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녀의 눈이 이채를 띠고 작은 놀라움을 드리운 채 웃음을 머금었다. 계속 해보게. 그녀가 말했다. 코우칸은 한 번 입을 떼자 생각보다 그리 어렵지 않음을 느꼈다. 애초에 목숨 따위는 아깝지 않았다. 망설일 이유는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저는 왕이라서 주상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상이 왕이기에 곁에서 섬기기로 마음먹은 것입니다. 애초에 세키시님을 선택한 제게 세키시가 아닌 왕에게 답을 하라니요. 어불성설입니다. 주인의 죽음을 감히 허락할 종 따위, 있을 리 없습니다.」

「그 것은, 내가 길을 잃는다 해도? 내가 실도하여 케이키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백성을 요마의 소행보다도 더한 두려움과 황폐로 몰아넣을 텐데도?」

「저는 주상 전하를 선택하며 어전을 떠나지 않고 충성을 다할 것을 마음 깊이 서약 드렸습니다. 그것은 황공하옵니다만 타이호께도 뒤지지 않습니다. 주상에게서 왕기를 읽어 천의에 따라 머리를 숙인 기린이 아니라, 제 자신의 의지로 주상을 선택해 목숨이 다할 때까지 전하의 곁을 지키기로 한 것입니다. 설령, 그 목숨의 끝이 주인의 목숨을 끊어내고 불명예한 대역죄로 더럽혀진다 해도.」

 

왕은 조금 크게 뜨인 눈으로 코우칸을 응시했다. 그리고는 두 손으로 찻잔을 감쌌다.

 

「총재가 감상적인 말을 하는 것은 처음 듣는군.」

 

코우칸은 왕을 쳐다보았다. 왕은 쓰게 웃고 있었다. 거센 풍랑을 만나 버겁게 흔들리면서도 어떻게든 백성과 조정을 지켜내려는 그녀가 실도 따위를 할 리 없다. 천제의 앞에서라도 보증할 수 있다. 그래서 더욱이 그녀를 놓을 수 없었다. 퇴위를 바라는 그녀를 자신의 욕심으로 붙잡고 있는 것이라 해도.

 

「그렇다면 태사는? 태사는 어찌 생각하시는가.」

 

엔호는 쓰게 웃었다.

 

「코우칸의 말을 듣고 이제야 기억이 났습니다. 저 또한 저를 청하신 주상을 선택한 것입니다. 요우시가 있는 조정을 선택한 것입니다.」

「엔호.」

「아직은 주상을 믿어보고 싶습니다. 백성도, 백관제후도 주상의 사람입니다. 주상께서 도를 잃으실 리는 없겠지요.」

 

허심탄회하게 가벼운 어깨로 웃는 엔호를 보며 왕은 쓰게 웃었다.

 

「나의 신하들은, 하나같이 어리석군.」

 

코우칸은 왕의 한숨 같은 중얼거림에 쓴 웃음을 지었다.

 

§

 

요코는 햇빛이 유리 위로 내려앉는 파리궁 안에서 밖을 내다보았다. 두 손으로 모아 쥔 찻잔을 미세하게 흔들자 차 속에 피어난 꽃이 꽃잎으로 하늘하늘 춤을 춘다. 그것이 참 예쁘다는 생각을 하고는 고개를 들어 정면을 응시했다. 그 앞에는 자신의 반신이 자신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케이키는 어색한 자리에 앉혀진 것 마냥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가능한 한 숨기려고 하지만 하루 이틀 함께 한 사이가 아니다. 요코는 그것이 못내 미안했다. 인간으로서의 생명을 다 하고 자아상실에 대한 위협이 느껴지자 그를 몰아세우며 그에게 씻기지 못할 상처를 남겼다. 기린의 천성이라는 것 때문에 나를 떠나지 못하는 것이라면, 죽어서라도 내게서 해방되기를 바랐어.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아직까지도 여왕 죠카크를 간간히 그리는 케이키를. 자신이 그를 해방시킨다 해도, 그는 몇 명의 왕을 고르든 자신에게서 해방될 수 없다. 그래서 자신이 앞장서 그와 자신에게 천의가 이어놓은 무겁기 그지없던 속박의 사슬을 풀어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게 되었다. 총재와 태사에게 목을 맡긴 자신은 이제 끊임없이 스스로를, 케이키를 괴롭혀갈 터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혀갈까. 그것이 요코는 두려웠다.

 

「케이키, 봉래에는 <라이너스의 담요>라는 말이 있어.」

「라이너스……. 그것이 무엇입니까.」

「동화야.」

「네?」

「동화. 라이너스라는 어린 아이는 성서……, 그래. 이쪽의 말로 바꿔보자면 태강 정도일까. 그것을 모조리 외는 천잰데, 그런 천재조차도, 안심담요라는 것이 없으면 병적으로 불안해 해. 낡아빠지고 볼품없는 담요일 뿐인데도.」

 

요코는 의아함을 담은 케이키의 자색 눈을 보며 쓴 웃음을 지었다. 그는 자신의 주인이 왜 갑자기 그런 이야기를 하는 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케이키는 애원도, 눈물도, 분노도 보이지 않는 왕을 보았다. 그 모습은 상당히 오랜만이었다. 등허리에 얹힌 긴장이 아주 조금씩이나마 풀려가기 시작했다.

 

「갑자기 왜 그게 나한테 대입되는 건지는 모르겠어. 나는 라이너스 같은 천재도 아닌걸.」

 

요코는 파리궁 바깥의 정원을 쳐다보았다. 인공시내를 따라 미지근한 물이 시원한 소리를 내며 흘러가고 있었다. 햇빛을 받아 황금빛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수면에 시선의 끝을 얹었다. 케이키는 한참동안이나 요코를 응시했다. 수십여 년 간 쌓여온 안타까움과 긴장감, 상처가 어느 샌가 조금씩 잊히고 있었다. 기린의 천성인 것인지, 왕에 대한 신하이자 반신의 경애인지,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피고름을 얹으며 쌓아온 애증은 졸졸 흐르는 소리를 내는 물소리를 따라 어디론가 씻겨 흘러가고 있었다. 요코는 어느 순간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케이키의 곁으로 다가왔다. 케이키는 얼어붙은 채 일어나지도 못하고 왕을 올려다보았다.

 

「낡아빠져 볼품없기는커녕 내게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담요야.」

 

케이키는 주인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어 잠시 멍하니 주인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하고 있던 이야기의 연속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제야 잠에서 깬 듯 얼른 왕을 따라 일어나려던 케이키의 뺨에 요코는 가볍게 손을 얹었다. 안쓰럽도록 여윈 손가락이, 이윽고 손바닥이 케이키의 한 쪽 뺨에 닿았다. 케이키는 일어나지도 못한 채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오랜만에 주인에게서 받는 따스한 손길이었다. 마치 마음이 넘쳐흘러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난 더 이상 인간이 아니야. 하지만 케이키는 민의의 구현이야. 내 낡아빠져 볼품없는 담요는 케이키가 대표하는 모든 인간의 마음 중 하나겠지.」

「…….」

「난 인간으로서의 나에 대해 욕심이 많거든. 그것을 언제 잃을 지 불안하니까. 내가 언제든 나의 <인간다움>을 잃지 않도록 꼭 곁에 있어줬으면 해.」

「주상.」

「처음 내게 무릎을 꿇으며 했던 서약을 잊지 마. 곁을 떠나지 말아줘.」

「……물론입니다.」

 

요코는 쓰게 웃었다.

 

「미안해. 실은 나, 코우칸과 엔호에게서 허락을 얻어내지 못했거든. 난 앞으로도 케이키를 몇 번이고 상처 입힐 거야.」

「왕과 함께인 것을 저어할 기린은 없습니다.」

「응. 앞으로도 잘 부탁해.」

 

요코는 다시 한 번 미안하다는 한 마디를 케이키에게 떨어뜨렸다. 케이키는 드물게도 웃는 얼굴을 보이며 자색 눈을 금빛 속눈썹 아래로 감추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뺨에 닿은 뼈마디가 드러날 정도로 여위고 거칠지만 세상 그 무엇보다도 부드럽고 아름다운 손길에 고개를 미미하게 기울였다. 상냥하게 흔들리는 주인의 목소리와 따뜻하게 뺨을 어루만지는 주인의 손을 이 순간만은 영원같이 마냥 느끼고 싶었다.